폭신한 초콜릿 무스 등에 활용… 닭육수 낼 때 넣으면 맛 풍성해져
가루형ㆍ판형 중에 편한 쪽 골라 따뜻한 물에 타서 휘휘 저으면 끝
말단으로 만 4년에서 3개월 빠지게 근무했던 건축 회사에는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었다. 금요일 아침을 팀원들이 돌아가며 준비해 와 함께 먹는 일이었다. 금요일이니 약간 느긋하게 일하자는 심리도 있었지만 회사의 변화나 전달사항 등을 팀원들에게 전파하는 목적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대강 아무 음식이나 사서 가져가도 상관없건만, 나는 2~3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는 차례를 요리 연습의 기회로 삼고자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의욕이 도를 넘어 버려 언젠가부터 디저트까지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가장 야심찬 디저트는 초콜릿 무스였는데, 젤라틴으로 굳힌지라 채식을 한다면 먹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나 재료를 채 밝히기도 전에 인도인 동료가 집어 먹는 일이 벌어졌고, 재료 이야기를 꺼내면 그나마 맛있게 먹은 기분마저 상할까 나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식생활 지평 넓히는 젤라틴
젤라틴이 동물성 식재료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물의 결합조직에 있는 콜라겐이 열로 분해되면 유일하게 액체를 굳힐 수 있는 단백질인 젤라틴이 된다. 소나 돼지는 물론 닭과 같은 동물, 광어 서더리 같은 해산물을 뽀얗게 우러날 때까지 푹 끓인 뒤 식히면 출렁거리는 젤리처럼 굳는 현상이 바로 젤라틴의 힘 때문이다. 맛을 아예 안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재료에 비해 미량을 쓰니 느껴지지 않고, 전분처럼 액체를 굳힐 수 있는 다른 식재료에 비교하면 결과물이 투명하고 깨끗하므로 많은 음식 혹은 식품에 소리소문 없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요구르트이다. 원래 요구르트는 우유를 발효시켜 걸쭉하게 만드는데 단백질 함유량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제품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특히 지방까지 완전히 들어낸 경우 더욱 심해, 젤라틴을 첨가하지 않으면 요구르트의 제형이 나올 수가 없다. 말하자면 요구르트라기보다 우유맛 젤리에 가깝고, 사실 젤라틴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안타까운 경우를 빼면 젤라틴은 제과제빵에서 보이지 않으며 두각을 나타내니, 비단 젤리뿐만 아니라 무스 등 폭신하도록 공기를 불어넣은 식재료를 그 상태 그대로, 최대한 가볍게 잡아 고정시켜 주는 데 쓰인다.
그래서 원리와 활용 요령을 익혀 두면 의외로 식생활의 지평을 넓히는데 제 몫을 톡톡히 한다. 일단 조리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가 입문을 원할 때 일종의 교육 보조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릇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고 녹여 그대로 굳히면 끝인 인스턴트 젤리 이야기다. 젤라틴과 설탕, 향신료 수준의 간단한 재료로 이루어진 데다가 조리도 쉬워 따라만 하면 99.9% 실패하지 않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물 끓이기부터 시작해 계량, 휘젓기 같은 기본적인 움직임과 친숙해질 수 있으니 초보가 조리의 첫 장벽을 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실제로 나도 인스턴트 젤리를 좋아해 많이 만들면서 조리에 익숙해졌다. 냄비든 전기주전자든 써서 물을 끓이고 적절한 크기의 용기에 가루를 담고 딱 정량의 물만 부은 뒤 식히고 굳을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먹을 수 있는 좋아하는 음식인 젤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었다. 인스턴트 젤리는 마트나 인터넷에서 쉽게 살 수 있으므로 두려워서 조리에 손을 못 대고 있다면 시도해 보자. 좋아하는 맛을 골라 다섯 번에서 열 번 정도 만들어 먹고 나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젤라틴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마트나 백화점의 제과제빵 재료 코너에서 찾을 수 있는 가루형과 방산시장의 제과 도매상에서 살 수 있는 판형이다. 팔리는 장소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집에서 편하게 쓰기에는 가루형이 만만하지만(실제로 가정용 레시피는 대부분 가루형 젤라틴을 기준으로 삼는다), 프로인 제과제빵업계 종사자는 판형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판 젤라틴은 딱딱한 투명 필름 같은 상태인데, 가루에 비하면 표면적이 훨씬 적으므로 액체에 섞기 위해 많이 휘저을 필요가 없다. 그 결과 가루형에 굳힌 액체가 훨씬 맑고 투명해진다는 장점을 지닌다.
가루형은 굳히려는 액체의 일부에 불려서, 판형은 따뜻한 물에 누글누글해질 때까지 담가 두었다 쓴다. 물론 가루형이나 판형이나 같은 젤라틴이므로 호환해 쓸 수 있다. 판형 4장이 가루 젤라틴 35.5g(2.5 작은술)이니 1장에 약 9g이라 기억하면 된다. 젤라틴의 양에 따라 결과물의 질감이 사뭇 달라지는데, 무게 대비 액체의 1.5%면 가볍고 출렁이는 젤리를 만들 수 있고 3%면 좀 더 단단하고 뻣뻣한 상태를 얻을 수 있다.
◇젤라틴 활용 요리
인스턴트 젤리나 푸딩으로 젤라틴에 익숙해졌다면 다음 단계로는 직접 만드는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래도 제과제빵에서 젤라틴을 활발히 쓰다 보니 난이도가 높은 음식만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자기 밥이나 만들어 먹고 사는 사람이 초콜릿 무스를 20인분쯤 만들어 회사에 가져갈 수 있는 수준이다. 맞다, 맨 처음에 언급한 바로 그 초콜릿 무스 말이다.
◇초콜릿 무스(6~8인분)
생크림 420㎖
세미스위트 초콜릿칩 340g
에스프레소 혹은 진한 커피 85g
진한색 럼(*) 1큰술
버터 60g
가루형 젤라틴 1작은술
소금 약간
*어른이 먹을 경우에만 더한다. 위스키나 오렌지맛 리큐어인 쿠앵트로, 그랑 마니에르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 파인애플 향을 풍기는 수정방 같은 술도 다른 느낌으로 잘 어울리니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리큐어로 맛을 내도 좋다.
1. 생크림 300㎖를 넓은 샐러드볼에 담아 냉장실에 차게 둔다.
2. 물 중탕을 준비한다. 냄비에 물을 담아 불에 올려, 끓을락말락 할 때까지 온도를 높인다. 내열 유리나 스테인리스스틸 샐러드 볼에 초콜릿, 커피, 럼을 담아 냄비 위에 올린다. 가끔 스패출러나 거품기로 저으며 녹이다가 초콜릿칩의 형태가 아직 남아 있을 때 내린다. 남은 열로 마저 익을 것이다.
3. 남은 생크림을 공기 등에 담고 젤라틴을 솔솔 뿌려 잘 섞는다. 10분 뒤 크림이 살짝 굳은 상태가 되면 2의 녹인 초콜릿에 더해 거품기로 잘 섞어 준다.
4. 냉장고에서 1의 생크림과 볼을 꺼내 거품기로 휘저어 올린다. 액체인 생크림에 공기가 들어가 부피가 커지는 가운데, 적절한 상태는 거품기로 찍어 보았을 때 생기는 ‘뿔’로 파악할 수 있다. 충분히 공기를 불어 넣지 않았다면 거품기에 뿔을 이룰 만큼 크림이 묻어나지 않고, 오래 휘저으면 거품기를 뒤집어도 뿔의 끝이 휘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서 있는다. 이 무스를 위해서는 생크림이 중간, 즉 뿔이 거품기에 확실히 모양이 잡힌 상태로 묻어나지만 끝은 살짝 굽는 단계까지만 올린다.
5. 휘저어 올린 생크림의 4분의 1을 4의 초콜릿에 더해 잘 섞어 준다. 나머지 생크림은 이등분해 반씩 더하는데, 이때 스패출러로 힘을 주어 휘젓지 않고, 초콜릿과 생크림을 포개어 준다는 느낌으로 저어 올린다.
6. 유리컵이나 공기 같은 개별 그릇에 나눠 담아 냉장고에 적어도 1시간 두어 굳힌다. 그냥 먹어도 상관없고 과일을 올려도 좋다. 여러 사람이 먹는다면 개별 그릇에 나눠 담지만 혼자 먹을 거라면 볼째 굳혀 퍼먹는 재미도 쏠쏠하니 참고하자.
이처럼 젤라틴의 자리는 주로 제과제빵, 특히 디저트이지만 끼니를 위한 짠맛 위주의 음식(Savory Food)에서도 은근슬쩍 자기 몫을 할 수 있다. 이미 쓰기 좋은 상태로 가공을 해 놓은데다가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고기며 생선 같은 동물성 재료를 번거롭게 푹 끓이지 않고도 풍성한 질감과 감촉을 낼 수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꼼수로 쓰이는 것이다. 맛의 바탕으로 두루 쓰는 닭 육수의 레시피를 예로 들어 보자.
◇속성 닭 육수(2L분)
가루 젤라틴 28g(약 3봉지)
날개, 등뼈 등 닭 자투리 1㎏
닭다리 1㎏
양파 큰 것 1개, 굵게 썬다
당근 큰 것 1개, 굵게 썬다
셀러리 줄기 2대, 굵게 썬다
월계수잎 2장
통후추 2작은술
1. 대접에 물 1L를 담고 젤라틴을 녹여 10분 동안 둔다.
2. 그 사이 닭 자투리를 가위나 식칼로 최대한 잘게 쪼갠다.
3. 육수 솥에 닭 자투리와 다릿살, 채소 일체를, 불린 젤라틴을 담고 물 2L를 부어 센 불에 올린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불을 적절히 줄이고 떠오르는 거품 및 찌꺼기를 걷어 낸다. 재료가 물에 잠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물을 보충해 가며 45분동안 끓인다.
4. 다릿살은 건져내고 나머지는 체로 걸러 육수만 남긴다.
5. 체로 거른 자투리는 버리고 다릿살은 먹는다. 셀러리, 오이, 올리브 등을 더해 마요네즈로 버무린 샐러드에 잘 어울린다.
◇식물성 젤라틴, 펙틴 한천 곤약
지금껏 살펴보았듯 젤라틴은 동물성 식재료이다. 따라서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채식을 지향하는 이라면 기본적으로 피해야 한다. 그럼 젤리 종류도 국물의 걸쭉한 질감이나 풍성한 감촉도 모두 멀리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는 않다. 젤라틴의 식물성 대체재가 두 가지나 있다. 바로 펙틴과 한천이다. 펙틴은 식물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콜로이드성 다당류로 잼류의 걸쭉함을 책임진다. 딸기, 무화과 등 같은 과일은 끓여서 자체 분해되는 펙틴만으로 잼을 만들 수 있지만, 요즘은 대체로 사과에서 추출한 걸 더해 고른 질감 및 감촉을 얻는다. 껍질을 끓인 뒤 식혀 가루 형태로 가공한 제품을 방산시장이나 인터넷 상점 등에서 쉽게 살 수 있다. 비단 젤리뿐 아니라 젤라틴과 똑같이 채식 국물이나 소스에 풍성한 질감을 불어넣는 데도 쓸 수 있다.
펙틴이 잼의 재료라면 한천은 양갱의 재료이다. 우뭇가사리, 개우무, 새발 등 우뭇가사리과의 해초를 펙틴과 흡사한 원리로 끓여 낸 국물을 졸이고 식혀 가루로 만든다. 펙틴과 한천 모두 젤라틴의 식물성 대체재로서 액체를 젤리와 흡사한 상태로 굳힐 수 있지만 질감은 각기 사뭇 다르다. 펙틴으로 만든 젤리는 좀 더 질깃하며 한천으로 굳힌 양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에 저항이 거의 없으니 젤라틴을 쓴 결과물처럼 탱글거리는 느낌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대체재인 곤약 젤리가 있으니 좌절은 금물이다. 곤약은 구약나물의 알줄기를 건조, 분쇄 및 도정한 가루에 물과 알칼리성 응고제를 더해 가열한 후 식히고 굳혀 만든다. 질감이 젤라틴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를 끄는 것처럼 젤리 제품도 대체로 0칼로리라 목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만 조금 기울이면 완전히 마음을 푹 놓고 먹을 수 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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