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부산 남구 우암동 내호냉면
함흥서 ‘동춘면옥’으로 시작, 올해 100주년
피란 내려와 부산서 ‘내호냉면’으로 이어가
1959년 미군 구호품 밀가루로 ‘밀면’ 개발
여름엔 1000그릇 이상 팔리며 문전성시
“스토리 담아 문화 콘텐츠로 만드는 게 목표”
부산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돼지국밥과 어묵, 동래파전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부산에서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밀면’이다.
밀면은 6·25전쟁이 한창이었던 1950년대 초반 북한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이 구호물품인 밀가루를 활용해 냉면을 만들어 먹던 데서 유래됐다. 냉면보다 저렴한 가격 탓에 당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실향민들의 주린 배를 채우던 음식이다. 본래 ‘밀냉면’, ‘경상도냉면’이라 불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밀면’으로 축약됐다.
부산의 대표 음식답게 밀면 판매 음식점 수는 부산에서만 500곳이 넘는다. 이 중에서도 1호 가게, 즉 ‘원조’는 있다. 1919년에 개업해 올해 100주년을 맞은 부산 밀면의 시초 ‘내호냉면’이 그 곳이다. 원래 내호냉면은 ‘함흥냉면’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상호명에도 ‘밀면’ 대신 ‘냉면’이 들어간다. 하지만 현재는 밀면이 더 잘 알려져 있다.
15일 오전 부산 남구 우암동구시장 안쪽 골목길내 자리한 내호냉면을 찾았을 때도 손님들은 붐볐다.
학생 때부터 이 집 단골이라는 박경모(54)씨는 “일이 있어 근처에 왔다가 이 맛이 그리워 한 번 들렀다”면서 “단순히 밀면을 먹는 게 아니라 추억을 먹는 기분이라 여기만 오면 항상 좋다”고 말했다.
가게는 본관과 별관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각 테이블이 9개 정도 촘촘하게 들어가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메뉴는 냉면(물, 비빔)과 밀면(물, 비빔), 가오리회무침, 양념가오리회, 만두가 전부다. 찬바람이 불면 온면과 국수, 비빔국수가 추가된다.
오래된 전통 만큼, 단골도 적지 않다. 30년 넘게 내호냉명을 찾고 있다는 최진출(67)씨는 “아버지가 이 집 냉면에서만 고향 맛이 난다고 좋아하셔 자주 왔다”면서 “그렇게 덩달아 따라 오다 보니 나도 어느덧 단골이 됐다”고 전했다.
대구에서 왔다는 허영숙(46·여)씨는 “남편이랑 부산으로 놀러 왔다가 최초로 밀면을 만든 집이라고 해 맛이 궁금해 오게 됐다”면서 “다른 밀면에 비해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한 맛이 매력인 것 같다”고 품평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건물 외관은 허름했지만 가게 안은 깔끔했다. 100년 ‘노포(老舖)’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 쪽 벽면에는 1, 2, 3대 주인장 얼굴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벽면 곳곳에는 각종 상패와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흔적들도 가득했다.
지난해 3월 어머니로부터 가게 운영을 넘겨 받아 4대 대표가 된 유재우(43)씨는 “외증조할머니이시자 1대 주인인 고(故) 이영순 할머니께서 1950년 12월 부산으로 피난 오신 뒤 본관이 있는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다”면서 “‘솥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유언에 따라 가게는 옮기지 않고 앞집, 옆집을 확장해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3대 주인인 유씨의 어머니 이춘복(69)씨는 아직도 주방을 지키고 있다. 이날도 주문 받은 밀면에 고명과 육수를 얹으며 손맛을 더했다. 이씨는 2대 주인이자 시어머니인 고(故) 정한금씨로부터 1978년 이어 받아 40년간 가게를 이끌어왔다. 이춘복씨는 “나이도 들고 해 지난해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씨에게 내호냉면의 역사에 대해 묻자, 할말이 많은 듯 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씨는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내호리에서 이영순 할머니가 1919년 10월부터 운영한 ‘동춘면옥’이라는 농마국수집(함흥냉면의 북한식 이름)이 내호냉면의 뿌리”라고 운을 뗐다.
이영순 할머니는 큰딸인 정한금씨와 함께 동춘면옥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 영순씨는 큰딸을 비롯한 5남매 등과 1950년 12월 흥남부두 철수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오게 됐다.
당시 부산 곳곳에는 피란민들의 정착촌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공동묘지, 미군부대 주둔지 같은 평지는 물론 가파른 언덕에도 정착촌이 세워졌다. 영순씨 가족은 남구 우암동에 터를 잡았다.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생산된 소를 검역하고 반출하던 곳으로, 소 막사가 많았다. 지금도 이곳은 산 끝까지 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고, 소 막사를 변형해 가정집으로 쓰는 곳도 적지 않다.
1953년 3월 영순씨와 한금씨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곳에서 ‘내호냉면’을 개업했다. 상호명에 들어간 ‘내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메뉴는 동춘면옥에서 팔던 함흥냉면이었다. 실향민들은 고향의 맛이 난다고 이 국수를 좋아했지만 현지인들은 질긴 면발에 매운맛이 강하고 가자미식해가 올라간 함흥냉면에 거부감을 보였다 한다.
이춘복씨는 “추운 지방에서 나는 감자전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구마전분을 써 냉면을 만들었고, 당시 우암동에 미군 보급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구호품으로 나오는 밀가루를 이용해서도 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면서 “그때가 1959년쯤이었는데 그게 지금 부산 밀면의 시초”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내호냉면의 밀면은 냉면에 가깝다. 그래서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깔끔하다. 이유는 사용된 육수와 고명이 같기 때문이다. 육수는 소고기 사골에 쇠심줄, 사태 등이 들어간다. 비빔을 먹을 때 나오는 맛보기 육수와는 다르게 맑은 게 특징이다. 고명은 가오리무침과 편육, 계란, 배, 오이 등이 올라간다.
밀면과 냉면이 다른 건 오직 면 뿐이다. 냉면은 고구마전분만으로 면을 뽑고, 밀면은 밀가루와 고구마전분이 7대 3의 비율로 들어간다. 그래서 냉면(9,000원)이 밀면(6,000원)보다 비싸고, 식감은 더 쫄깃하다. 반죽도 매일 한다. 숙성 시간은 48시간이다.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음식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유재우 대표는 “냉면과 밀면을 낼 때에도 그릇에 면을 담고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과 설탕 등으로 밑간을 한 번 더 한다”면서 “이렇게 밑간을 해주면 면 한 가닥 한 가닥에 감칠맛이 더 해진다”고 설명했다.
부산의 다른 밀면집은 내호냉면보다 맛이 강하다. 맵고, 달다. 내호냉면과 면도 다르고, 육수도 다르다. 가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고구마전분 비율이 낮고, 밀가루만 쓰는 집도 많다. 돼지고기로 육수를 내거나, 육수에 한약재를 넣는 곳도 있다.
유 대표는 “요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밀면 맛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하면서 타 지역사람들이 밀면이 자극적인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원래 밀면도 평양냉면처럼 심심한 맛의 매력이 있는 음식”이라고 강조했다.
여름이면 내호냉면 앞은 전국의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매일 1,000그릇 이상이 팔린다. 최근엔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20대 후반부터 본격 가업에 뛰어들었다는 유 대표는 “맛있다는 말보다 밀면의 역사를 알고 간다는 말이 더 기분 좋다”면서 “밀면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분점도 생각 중”이라고 사업 확장 계획도 내비쳤다.
그의 꿈은 밀면을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만드는 것. 유 대표는 “밀면은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아픈 부산물 중 하나”라며 “피란민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우암동의 특징을 잘 살리고, 밀면이 생기게 된 스토리를 담아 가게를 하나의 역사관처럼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부산=글·사진 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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