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겸 저널리스트 아이리스 장이 쓴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라는 책에는 만주사변 직전 1920~30년대 초 일본의 젊은 군인들이 어떻게 극우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휩쓸려 들었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메이지 시대 3,000만명 안팎이던 일본 인구가 1930년 6,500만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농업 생산성은 그에 턱없이 못 미쳐 기아와 인플레가 심했고, 사회주의 이념의 노동쟁의로 사회도 불안정했다. 군인 중에는 정당 정치와 무능한 관료들에게 일본의 미래를 맡겨두는 건 엘리트로서 역사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오직 군부가 천왕 중심으로 뭉쳐 일본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 육군 중령 하시모토 긴고로(1890~1957)가 그 무렵 썼다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연설’의 일부가 저 책에 인용돼 있다.
“일본이 현재와 같은 인구 과잉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이민과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적 경쟁, 영토 확장이 그것이다. 첫 번째 대안인 이민은 다른 나라의 반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두 번째는 관세 문제와 상업 조약 때문에 여의치 못하다. 세 가지 대안 중 두 가지 길이 이미 막혀 있다면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세계를 제패하고자 했고, 그 처음이 조선과 중국이었다. 그 엄청난 야심과 자신감에 수많은 청년들이, 특히 젊은 장교들이 동조했다.
하시모토 긴고로가 1930년 9월 조직한 ‘사쿠라회(櫻會)’는 만주사변 직후인 이듬해 10월 21일 쿠데타(10월 사건)를 일으켰다. 당시 조직원 수는 영관ᆞ위관급 장교만 수백 명에 달했다. ‘10월 사건’이라 불리는 그 쿠데타는 제국 군참모본부의 승인 없이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거였다. 황궁경비대와 해군 폭격기 편대 등이 가세한 쿠데타는 실패했고 사쿠라회는 해산됐지만, 긴고로 등 쿠데타 주역은 애국 충정을 인정 받아 군부 지지 속에 사실상 처벌받지 않았다. 군인 쿠데타는 32년, 36년 이어졌다.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긴고로는 48년 극동군사재판에 A급 전범(총 25명)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55년 가석방됐다. 1956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고, 57년 폐암으로 숨져 야스쿠니 신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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