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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보다 몸짓… 관객 감각 깨우는 ‘신체극’들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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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보다 몸짓… 관객 감각 깨우는 ‘신체극’들의 매혹

입력
2019.10.14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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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까지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한 장면. 두 개의 경사진 원형 무대에서 배우들은 끊임 없이 빙빙 돌며 연기한다. 신지후 기자
27일까지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한 장면. 두 개의 경사진 원형 무대에서 배우들은 끊임 없이 빙빙 돌며 연기한다. 신지후 기자

보름달을 닮은 두 개의 기울어진 원형 무대 위. 그 꼭대기 즈음에 쓰러져 상체만 겨우 일으켜 세운 두 인물이 서로를 끌어 안고 빙빙 돈다. 대사 한 단어 끝에 하나의 움직임이 잇따른다. “내가 널”(한 발짝), “지켜줄게”(한 발짝), “과거로부터”(한 발짝), “너를”(한 발짝), “지켜줄게”(한 발짝)…. ‘여자’(유은숙)는 경사로 인한 중력을 이기려 발끝을 세운 채 자신과 ‘남자’(김석주)의 몸을 돌려가며 원을 그린다. 스러져가는 남자를 보듬는 ‘여자’의 처절한 행동과 삶을 놓아버린 듯한 ‘남자’의 흐물되는 몸짓이 그 어떤 대사나 해설보다 관객의 감정을 깊게 흔들어 놓는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서울 남산예술센터ㆍ이달 27일까지)은 대사만큼이나 배우들의 몸동작이 주가 되는 일종의 신체극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7명의 배우는 극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원형 무대의 가장 자리를 뱅뱅 돈다. 배우들의 몸짓도 단순히 일반 연극에서 사용되는 과장된 연기와는 다르다. 발목을 배배 꼰 채 걸음을 겨우 5㎝쯤 옮기는 괴기스럽고 부자연스런 행동부터 자꾸만 가방을 추켜 매고, 가방 안을 들여다 보고, 머리카락을 털어내려는 듯 얼굴을 흔들어대는 신경질적인 모습의 묘사까지 기묘한 몸짓의 연속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몸을 배배 꼬며 불안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몸을 배배 꼬며 불안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그믐…’처럼 배우의 동작을 언어화 한 신체극들이 잇따라 국내 무대에 올라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과거 신체극은 대사 없이 몸짓으로만 이야기와 메시지를 표현하는 극을 뜻했다면 최근엔 독특한 신체 행동이 주요 요소로 작동하는 극을 포괄하는 의미로도 통한다. 극의 전통 형식을 파괴하고 상상력을 자극해 관객과 더 많은 감각적 접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장르다.

지난 1월 서울 중구 공연장 CKL 무대에 오른 ‘보이첵’은 배우들의 움직임, 음악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대표적 신체극이다. 몸을 구겼다가 펴는 배우들의 행동과 몸부림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며 외부 권력의 강압에 억눌리고 조종당하는 주인공 보이첵의 감정을 살려냈다. 거의 유일한 소품으로 의자 여러 개가 등장하는데, 배우들은 의자와 한 몸인 듯 움직이며 기묘한 분위기를 더한다. 마임니스트 출신 연출가로 신체극 대가로도 평가 받는 임도완 연출가의 작품으로, 2007년엔 영국 유명 공연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달 공연된 극 '스카팽' 속 레앙드르 역의 임준식 배우와 제롱뜨 역의 김한 배우가 신체 연기를 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지난달 공연된 극 '스카팽' 속 레앙드르 역의 임준식 배우와 제롱뜨 역의 김한 배우가 신체 연기를 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올해 흥행작으로 손꼽히는 ‘스카팽’도 몰리에르의 ‘스카팽의 간계’를 각색한 희극이지만 곳곳에 신체극의 특성이 묻어 있다. 이 작품 역시 임도완 연출가의 손에서 빚어진 만큼 우스꽝스럽지만 전형적이지는 않은 신체 언어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배우들은 각종 춤부터 마임까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몸짓을 다양하게 동원한다. 자신의 연기 몫을 끝낸 배우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연기 중인 다른 배우 옆에서 관객이자 효과음을 내는 악단으로서 끝없이 움직인다. 국립극단 작품이지만 신체극 전문 극단인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소속 배우인 이중현(스카팽 역), 성원(몰리에르 역)을 주역으로 캐스팅해 풍부한 신체 언어 구현을 가능케 했다.

신체극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는 이유는 독특한 움직임이 불러오는 극적 긴장감이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믐…’의 강량원 연출가에 따르면 지난해 초연 이후 관객들이 가장 많이 해 온 질문은 ‘배우들이 왜 몸을 그렇게 하죠’였다고 한다. 강 연출가는 “배우들이 전형적인 몸짓으로 관객과 소통을 시도하기 보다는 아주 개인적이고 독특한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관객의 감각을 확장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관객의 상상력이 커지게 되는데, 이는 곧 관객의 극 참여도가 높아짐을 뜻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신체극 '보이첵'의 한 장면.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제공
신체극 '보이첵'의 한 장면.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제공

배우들 입장에서도 신체극은 매력적인 도전 대상이다. 변주에 한계가 명확한 대사와는 달리 움직임에는 배우 저마다의 표현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큰 덕이다. ‘스카팽’과 ‘그믐…’의 공통점은 연출가가 배우의 신체 행동 연기에 대한 지침은 마련해두되 배우 스스로의 해석이 곁들어질 수 있도록 해두었다는 것이다. ‘스카팽’의 이중현은 지난달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면 임도완 연출가가 살을 더해주는 방식으로 동작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강량원 연출가도 “대본에는 주로 대사만 쓰여있고 구체적 움직임 연기는 배우 개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 구현하도록 한다”고 강조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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