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한국적 아버지상 빚어낸 배우 김승호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배우 김승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그는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 종로 청진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연기자의 자질에 눈을 뜬 건 보성중학교 재학 중의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열중을 해버리면 곧잘 하는 몸짓, 손짓 덕에 선생님께 뽑혀서 연극을 했다.”(국제영화 1959년 3월호) 졸업한 뒤 화신백화점의 판매 사원으로 근무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었던 김승호는 1년 남짓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는 당시 상업극의 중심이었던 동양극장 청춘좌의 단원이 된다. 배우 지망생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던 극장 근처에서 보름 동안을 버텨내 간신히 입단 허락을 받은 그는 6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무대에 올랐는데, 이때 습득한 연기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는 훗날 배우로서 활동하는데 큰 자양분이 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로 영화에 일찍 데뷔했지만 21세의 김승호는 주목받지 못하는 초라한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후 그는 배우 주증녀, 정애란 등과 극단 청탑을 창립했다가 해산하고, 자유극장의 연기 부장을 맡는가 하면 황정순, 주선태과 함께 극단 대지를 창단하는 등 여러 무대를 전전했고,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와 전창근의 ‘해방된 내 고향’(1947)에 출연해 제대로 된 영화배우로서 신고식을 치른다. 한국전쟁의 발발하고 동료 배우들과 납북될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탈출한 김승호는 문정숙, 장일 등과 함께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3소대 소속이 되어 피난지인 부산과 대구에서 반공극을 무대에 올리는 일로 소일한다. 휴전 후 김기영의 ‘양산도’(1955)에 출연한 김승호는 옥랑의 아버지 무쇠 역을 열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 작품의 제작자로도 나서서 흥행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시집가는 날’(1957)은 김승호의 배우 경력을 전성기에 들게 한 전환점이었다.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김승호는 판서댁 아들을 사위로 들여 권세 있는 집안과 인척이 될 생각에 골몰하다가 낭패에 빠지는 맹 진사의 허영에 찬 성격을 희극적인 톤으로 연기해 “‘시집가는 날’은 김승호의 영화”(한국일보 1957년 5월 12일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영화의 성공은 4,500만환의 흥행 수입과 국내 언론의 호평에만 그치지 않았다. ’시집가는 날‘은 그 해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특별상인 최우수 희극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한국만의 향토적인 정서가 세계에 먹힐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일대 사건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김승호는 수십 편의 시나리오와 출연 요청을 받는 정상급 연기자로 발돋움해 김기영의 ’초설‘(1958), 김소동의 ’돈‘, 신상옥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과 유현목의 ’인생차압‘ 등에 잇달아 출연해 사장, 마을 유지, 복덕방 영감 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한 몸에 소화하며 각종 연기상을 쓸어 담는다.

 ◇초라한 무명 배우, 아버지 역으로 깊은 인상 
전성기 시절 김승호는 유현목 감독의 ‘인생차압’(1958)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극으로 배우일을 시작했지만 김승호는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걸 선호했다. 즉석에서 일회성의 공연에 그치는 연극보다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테이크를 반복하며 연기를 다듬을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걸 좋아했고, 성우의 더빙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에 바쁜 일정임에도 본인의 목소리는 직접 녹음하길 고집한 열정적인 연기자였다. 그의 매니저로 일했던 김진은 회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절름발이 역할을 맡았다, 또 안 그러면 극중에서 다리 부상을 당했다 그러면 실지 그 다리 부상을 당한 사람을 찾아 이런 상황에선 한쪽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구, 말하자면 (그렇게 배워서) 터득을 해. 그래 가지구 그거를 화면에 옮기느라구 애를 쓰지.” 강대진의 ‘마부’(1961)를 촬영할 때에도 진짜 마부처럼 보이기 위해 하루 종일 마부들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연기에 반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면세조치라는 특혜에 편승해 한국영화가 양산체제로 들어서고, 출연편수가 폭증함으로 인해 겹치기 출연의 관행이 만연해지자 김승호는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전략)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하나에서 열까지가 그 내용이 비슷비슷한 시나리오를 손에 들었을 때마다 얼마나 염증을 느끼는지 모른다. 지난해의 약 백 본에 달하는 영화의 산출은 나에게도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사실 나의 의욕을 사로잡은 작품은 겨우내 다섯 손가락에 꼽기가 힘든 것이다. 나는 나만이 구현할 수 있는 어떤 인간형을 이룩하고 싶다. 김승호하면 저절로 그 인간형을 머리에 떠오르게 할 수 있는...”(동아일보 1958년 11월 9일자)

그만의 인간형을 정립할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조긍하의 ‘곰’(1959)에서 김승호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딸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을 만난 뒤 바른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결심하는 중년의 목수로 분해 한국적인 서민 남성상의 한 모델을 구현했고, 빅터 플레밍의 1927년 동명 무성영화를 각색한 ‘육체의 길’(조긍하 감독은 1967년에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다)에서는 슬하에 네 남매를 둔 중산층 은행원이 젊고 아름다운 메리(김지미)를 만나게 되면서 겪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연기해 “전설로 남길만한 열연”(국제영화 5, 6월호)이라는 격찬과 더불어 2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낸다. 매너리즘을 떨쳐낸 김승호는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1960)에 이르러 ‘아버지 전문배우’의 이미지를 확고히 정립하게 된다. 슬하에 2남 3녀를 둔 소시민 가장의 애환을 그린 ‘로맨스 빠빠’에서의 아버지 연기는 ‘삼등과장’(1961), ‘골목 안 풍경’(1962), ‘월급봉투’(1964)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형 홈 드라마의 전형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 해 김승호는 4월 7일 제 7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영화제서 잇단 수상, 정치색으로 곤욕도 치러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그레이'(1963)는 김승호에게 아시아 영화제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시아 영화제에서 열리는 환영파티에 참석해있던 바로 다음날, 4ㆍ19 혁명이 터지고 김승호는 잠깐 동안 배우 경력의 위기를 맞는다. 임화수가 주도한 반공예술인단 활동에 관계되어 3ㆍ15 부정선거 때 자유당 지지연설을 했던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한국배우협회에서 제명당한 것이다. 그러나 김승호는 연기에 대한 뜻을 접지 않았고, 동국대 심리학과 수업을 청강하는 한편으로는 “칠십 살 안에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타고 말겠다”는 포부를 주변에 밝히곤 했다. 그만큼 연기력이 절륜한 배우를 찾기 어려웠던 영화계에선 김승호의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제명조치는 “대국적인 조치에서 김씨를 ‘컴빽’시키기로 합의”(조선일보 1960년 9월 3일)를 보면서 몇 개월간의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그치게 된다.

강대진의 ‘박서방’(1960)으로 복귀한 김승호는 연탄아궁이를 고치는 미장이 일로 생계를 꾸리며 3남매를 키우는 가난한 서민 집안의 가장으로 등장한다. 고집 세고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로맨스 빠빠’ 때와는 결이 다른 한국적 아버지의 표상을 그려낸 김승호는 제8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2회 연속으로 남우주연상을 석권한다. 이듬해 주연으로 출연한 ‘마부’가 제 11회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배우 본인은 신상옥의 ‘로맨스 그레이’(1963)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만 3회를 수상하면서 대배우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한국영화의 아버지 캐릭터를 대표하는 배우 김승호가 마침내 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아버지의 초상으로 승격되는 영광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한국영화의 장르가 다양화되고 홈 드라마의 입지가 위축되면서 김승호의 출연빈도 또한 줄어들게 된다. 또한 1965년 김포공항에서 촬영 도중 이를 중단시키려는 세관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공무집행 방해로 물의를 빚은데다, 본인이 제작자로 나선 영화들의 연이은 실패로 빚을 지게 되어 1968년 부정수표법 단속 위반혐의로 구속되면서 그동안 쌓아온 김승호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고 만다. 그럼에도 재기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김승호는 1968년 12월 1일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억울하다” 단 한 마디였다. 한국영화의 아버지를 도맡았던 대배우는 그렇게 허망히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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