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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보어전쟁 화염 뒤에서 웃은 ‘죽음의 무기상인’ 자하로프

입력
2019.10.12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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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영국-보어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 금광 등 남아공 이권 노려 침공했으나 초반엔 보어군에 열세 

 무기상 자하로프, 보어군에 총 팔아… 영국도 같은 무기 사서 싸워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제2차 영국-보어전쟁 당시였던 1900년 1월 보어군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주에 있는 언덕 스피온콥(Spion Kop)에서 찍은 전승 기념 사진. 스피온콥 전투는 전쟁 초반 보어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유리하게 전세를 이끌며 대승을 거둔 전투 중 하나다. ⓒ위키피디아
제2차 영국-보어전쟁 당시였던 1900년 1월 보어군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주에 있는 언덕 스피온콥(Spion Kop)에서 찍은 전승 기념 사진. 스피온콥 전투는 전쟁 초반 보어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유리하게 전세를 이끌며 대승을 거둔 전투 중 하나다. ⓒ위키피디아

1899년 10월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라녜자유국은 아프리카 남단에 위치한 영국 케이프식민지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 최남단에 식민지를 세웠다. 농부를 가리키는 네덜란드어 ‘보어’는 이후 이들 식민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됐다. 프랑스혁명전쟁 때인 1795년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보어의 땅을 빼앗았다. 영국의 지배가 싫었던 보어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 남아프리카와 오라녜 등의 여러 보어공화국을 세웠다. 즉 이 전쟁은 영국과 보어 사이의 전쟁이었다.

남아프리카는 영국을 상대로 이미 1880~81년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 남아프리카군은 사실 군대라기보다는 민병대에 가까웠다. 전투부대는 지역별로 편성되었다. 개별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과 말을 준비했다. 장교는 부대원들에 의해 선출됐다. 사냥으로 단련된 보어들은 몸을 숨긴 채 저격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1차 영국-보어전쟁에서 보어군은 자국 내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886년 남아프리카 수도 프레토리아 남쪽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은 다시 두 나라를 탐냈다. 케이프 총독 세실 로즈는 1895년 말 리앤더 제임슨이 지휘하는 600명을 남아프리카에 침투시켜 폭동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뻔뻔하게도 영국은 오히려 이를 기화로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모든 영국인에게 남아프리카인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남아프리카는 국경의 영국군을 48시간 내에 후퇴시키라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영국 언론은 남아프리카에 대한 조롱으로 지면을 도배했다. 늘 육군 병력이 빠듯했던 영국 정부는 그보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럼에도 병력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구식 무기 탓 수세 몰린 영국 

2차 영국-보어전쟁 개전 당시 1만3,000여 명이었던 케이프의 영국군은 1899년 11월 레드버스 헨리 뷸러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증파되면서 대폭 증강되었다. 3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뷸러의 군단을 포함하면 케이프의 영국군은 3만3,000명의 보어군보다 병력에서 앞섰다. 그럼에도 1899년 12월까지 벌어진 여러 주요 전투에서 영국군은 거듭 패배했다. 가령, 12월15일에 벌어진 콜렌소전투에서 2만1,000명의 영국군은 8,000명 보어군을 상대로 투겔라강을 건너려다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1,400명을, 보어군은 40명을 잃었다.

보어군 초반 선전의 한 원인은 보어군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남아프리카와 오라녜는 개전 전에 3만7,000정의 마우저 모델 1895를 구입했다. 마우저 모델 1895는 독일 무기회사 도이체바펜(DWM)이 1895년에 개량한 소총이었다. 총탄 5발을 클립을 통해 한번에 장전할 수 있고 유효사거리가 500m에 이르는 마우저는 당대 최고 수준의 소총이었다. 반면 영국제 소총은, 당시 영국군 일부가 사용한 마티니-엔필드나 흑색화약을 쓰는 리-메트포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개발연도(1895년)가 같은 리-엔필드마저 마우저에 비해 열세였다. 특히 장거리 정확도라는 면에서 영국 소총은 마우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남아프리카는 독일 무기회사 크루프와 프랑스 무기회사 슈나이더로부터 최신 야포와 공성포를 구입했다.

독일과 프랑스 무기회사가 보어에게 무기를 판 일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당시 두 나라는 영국과 제국주의적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를 점령하게 되면 그만큼 두 나라의 지역 내 영향력은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이런 경우 쓸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군대를 보내 개입하는 방법, 둘째는 돈을 빌려주는 방법, 셋째는 무기를 파는 방법이었다. 첫째 방법은 전쟁에 끌려들어가 큰 피해를 볼 각오를 해야 했다. 둘째 방법은 전쟁에 말려들 걱정은 없지만 돈을 빌려간 국가가 갚지 않을 위험이 만만치 않았다. 셋째 방법은 자국 군대의 소모 없이 적국을 괴롭히면서 돈까지 벌 수 있었다. 이야말로 일석삼조의 최선책이었다.

그렇기에 국가는 무기 제조를 중요한 일로 여겼다. 크루프와 슈나이더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육성을 받았다. 대신 비밀을 준수할 의무가 부과됐다. 이는 비단 근대의 일만은 아니었다. 8세기 프랑크왕국은 우수한 장검을 만드는 노하우가 뛰어났다. 이에 프랑크왕 샤를마뉴는 장검을 바이킹에게 파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도끼나 철퇴를 주로 쓰는 바이킹 손에 보다 우수한 무기가 쥐어지면 막기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자국 무기산업을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의지는 단지 군사적 관점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영국이 남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짓밟으려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독일 노벨회사가 남아프리카 내 독점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세계 화약시장을 독점한 노벨은 유럽 각국에 자회사를 두었다. 영국은 독일 노벨회사와 함께 영국 노벨회사도 돈을 벌 수 있기를 원했다.

‘죽음의 슈퍼세일즈맨’으로 불린 무기거래상 바실 자하로프
‘죽음의 슈퍼세일즈맨’으로 불린 무기거래상 바실 자하로프

 ◇영국에 영입된 ‘죽음의 세일즈맨’ 

영국 무기회사 중 대표주자는 비커스였다. 1828년 주조공장으로 시작된 비커스는 원래 양질의 교회 종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1880년대 후반부터 무기회사로 변신하기 시작한 비커스는 1897년 자회사 맥심노르덴펠트와 합병했다. 비커스가 대주주였던 기관총회사 맥심이 스웨덴 무기회사 노르덴펠트를 1888년에 인수해 맥심노르덴펠트가 생겨난 이유도 비커스가 원해서였다. 비커스와 맥심의 노르덴펠트 인수 결정 배후에는 전세계 기관총 시장을 독점하려는 의도 외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죽음의 슈퍼세일즈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실 자하로프를 영입하려는 의도였다.

1850년에 태어난 자하로프는 1877년 노르덴펠트의 아테네 주재 세일즈맨이 되었다. 노르덴펠트는 수중에서 어뢰 발사가 가능하다는 잠수함을 최초 개발했다. 자하로프는 이후 모든 무기회사가 교본으로 삼을 일을 보여줬다. 그는 먼저 두 척의 잠수함을 그리스에 팔았다. 이어 자하로프는 터키에게 접근했다. 자신이 판 잠수함에 관한 내밀한 정보를 터키에게 넘기면서 이들이 터키에게 큰 위협이라고 부추겼다. 터키는 결국 두 척을 샀다. 자하로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엔 러시아에게 그리스와 터키의 잠수함 구입 사실을 귀띔했다. 흑해의 제해권 상실이 걱정스러웠던 러시아도 두 척을 사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리스, 터키, 러시아가 산 잠수함은 어뢰발사는 고사하고 잠항이 거의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실제로 터키가 인수한 1번함은 어뢰발사 시험을 시도하다가 전복돼 침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노르덴펠트의 무기 중에 일명 ‘오르간총’이 있었다. 복수의 총열을 병렬로 연결한 오르간총은 하이람 맥심이 개발한 맥심기관총에 비해 거의 모든 면이 열세였다. 자하로프는 술, 여자, 속임수, 흑색선전, 그리고 뇌물을 총동원해 오스트리아군이 맥심기관총 대신 오르간총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무기상의 조국은 ‘시장’ 

자하로프는 맥심노르덴펠트가 비커스에 합병된 이후에도 비커스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죽음의 슈퍼세일즈맨’답게 무기를 필요로 하는 나라와 필요치 않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팔아댔다. 비커스가 맥심노르덴펠트와 합병한지 2년 만에 발발한 2차 영국-보어전쟁은 자하로프에게 그저 좋은 비즈니스 기회일 뿐이었다. 자하로프는 영국군에게 총과 탄약을 파는 걸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맥심의 기관총과 37㎜ 구경 자동포, 일명 ‘폼폼’을 보어군에게도 팔았다. 영국군은 보어군으로부터 폼폼의 포탄을 얻어맞은 후에야 비커스에게 폼폼을 주문했다. 자하로프는 비커스의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된다면 전쟁을 사주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우저를 생산하는 도이체바펜은 마쉬넨게베어, 즉 MG01이라는 기관총도 만들어 팔았다. 이는 맥심기관총의 라이센스 제품이었다.

2차 영국-보어전쟁의 전황은 1900년 1월부터 영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8만 명에 달하는 육군 병력을 케이프에 파견한 덕분이었다. 이만한 규모의 해외 파병은 영국이 이전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수준이었다. 같은 해 9월까지 영국군은 남아프리카와 오라녜를 명목상 점령했다. 보어들은 그후에도 게릴라전을 지속하다가 1902년 5월에 항복했다. 아프리카 남단의 영국군은 가장 많을 때 다른 식민지부대와 현지의 아프리카인부대를 포함해 5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 불어난 수만큼 비커스와 자하로프는 더 많은 무기를 팔 수 있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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