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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네커의 정육면체로 본 조국 사태

입력
2019.10.12 13: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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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독서록을 써서 담임 교사에게 제출한다. 의무는 아니지만, 담임 교사가 장려하는 자율 활동이다.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한 점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만큼 아이가 책을 다 읽은 뒤 독서록을 꼭 내도록 집에서도 독려하고 있다.

최근 아이가 읽은 책은 ‘15소년 표류기’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이 소설은 15명의 소년들이 탄 배가 한 소년의 장난으로 떠내려가 표류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폭풍우를 만나 무인도에 도착한 소년들은 섬을 탐험하며 나름대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아이가 독서록에 쓴 표현에 따르면 소년들은 처음엔 평화로웠지만, 점점 두 편으로 갈라졌다. 리더 역할을 해온 브리앙과 도니펀이 경쟁의식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면서 다른 소년들이 브리앙 편, 도니펀 편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전혀 해결될 것 같지 않던 갈등에 브리앙이 변화를 일으켰다. 팀원의 역할을 정할 때 도니펀이 하고 싶었던 사냥을 하게 해준 것이다. 아이는 “브리앙이 자신도 하고 싶었던 사냥을 경쟁자인 도니펀에게 양보한 것은 큰 용기였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바로 그 용기가 브리앙과 도니펀의 사이를 가깝게 해주었고, 15명의 소년들을 다시 하나로 모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년들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무인도에 불시착해 자신들을 위협한 어른 악당들을 소년 15명은 힘을 합쳐 물리쳤다.

아이는 소설 속 둘로 나뉜 소년들의 모습에서 요즘 우리나라 어른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떤 어른들은 조국 아저씨가 옳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어떤 어른들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어른들이 무슨 얘길 하는지 아이가 정확히 이해하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온 나라가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는 건 초등학생 눈에도 보이는 명백한 현실이다.

세상 일에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이는 비단 이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뇌도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디자인돼 있다. 영국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서 ‘네커의 정육면체’를 들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설명했다.

네커의 정육면체
네커의 정육면체

스위스의 결정학자 루이 알버트 네커가 처음 제시해 그의 이름이 붙었다고 알려진 네커의 정육면체는 정육면체의 모든 모서리를 실선으로 그린 간단한 투시도다. 도킨스는 진화론의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유전자와 운반자(개체)의 두 가지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 그림을 동원했다. 네커의 정육면체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으면 어느 한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정육면체인 것 같다가, 좀 있으면 그와 다른 방향을 향하는 정육면체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곤 이 두 가지 정육면체가 오락가락하면서 보이게 된다.

물론 두 방향의 정육면체 모두 틀린 게 아니다. 관점이 다를 뿐이다. 아무런 외부 영향이 없으면 사람들은 두 정육면체를 골고루 본다. 뇌가 한쪽 방향 정육면체를 인지했다가 다시 다른 방향 정육면체를 인지하는 걸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한쪽 방향 정육면체가 잘 보이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미국 사회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가 저서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에서 설명한 것처럼 객관적인 정보가 주어져도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인간의 의식이 이를 왜곡하고 편향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쪽 정육면체는 애써 못 본 체 할지 모른다.

‘조국 사태’가 불러온 광장 정치는 마치 네커의 정육면체에서 어느 한쪽 방향의 정육면체만 바라보려는 편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각자의 방향대로 향할 뿐 다른 방향은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가치관이나 처지에 따라 관점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할 수 있음에도 서로의 관점을 비난만 할 뿐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가 15소년 표류기를 읽은 이유는 학교가 정한 5학년 권장도서이기 때문이다. 독서록의 결론은, 이 책이 “어른들에게도 권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어른들은 브리앙 같은 용기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에 귀 기울여주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배려해주는 건 아이들 눈높이에서도 큰 용기다. 한발씩 물러나 두 방향의 정육면체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소년들처럼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들도 알고 있는 방법을 어른들은 외면하고 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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