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촬영장. 모든 스태프가 집에 가고 싶어한다. 마지막 한 장면인데,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이 필요하다. 배우만 바라보며 20여명이 대기하는 상황이면 누구나 머뭇거리다 노출을 하게 된다.’ 미국 한 연예기획사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8월 한 연예전문지에 밝힌 내용이다. 배우가 출연 계약서와 무관하게 촬영장에서 어쩔 수 없이 노출하게 되는 상황이 만연해 있다는 주장이다. 제 아무리 유명 배우라도 주변 사람들 눈총은 무서운 법이니까.
□ 2017년 10월 5일 뉴욕타임스 보도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은 미국 연예산업을 뒤흔들어 놓았다. 권력을 무기로 성추행을 일삼던 하비 와이스틴 같은 거물들이 퇴출됐고, 드라마ᆞ영화 촬영장의 노동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배우들은 계약서 작성 시 노출 관련 항목을 더 까다롭게 제시하고 있다. 촬영장 스태프가 배우의 신체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외부로 유출하면 제작사가 책임지는 식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 연기로 유명한 앤디 서키스 같은 이들은 이런 움직임이 창의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6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최근엔 ‘성행위 연기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까지 등장했다. 성행위 장면 촬영 시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할 지를 협의ᆞ지도하는 신종 직업이다. 액션 장면을 찍을 때 배우가 다치지 않게 몸동작을 꼼꼼히 계산하는 것처럼 성행위 연기도 세심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출자와 배우 간 협의를 거쳐 성행위 연기가 이뤄졌다 해도 돌발적 상황 발생이 적지 않았다. 유명 배우 제임스 프랭코는 2015년 성행위 장면을 연기하다 부적절한 행동을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 성행위 연기 코디네이터는 지난해 미국 HBO 드라마 ‘더 듀스’(1970년대 미국 포르노산업을 다룬다)의 촬영장에서 처음 도입됐다. 배우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HBO는 성행위 연기 코디네이터를 촬영장에 반드시 배치해야 한다는 내규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세계적인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OTT) 넷플릭스와 아마존 프라임도 성행위 연기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고 있다. 성행위 연기 코디네이터 국제협회(IDI)도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폭로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새 직업까지 창출해낸다. 미투가 이끌어낸 연예계의 또 다른 풍경이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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