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2>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딸 같았던 다정한 아들, 내가 놓친 듯 죄책감” 
 비정규직이라서 죽는 세상 바꾸려 김용균재단 출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참변을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아들의 사진을 그린 그림을 안고 있다. 생전 용균씨는 엄마에게 뽀뽀를 할 정도로 애교가 많았고, 김미숙씨도 아들을 뒤에서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박형기 인턴기자

4년제 대학을 가고 싶다는데, 취업 생각하면 전문대가 낫다고 권해서 그랬나. 역사를 좋아했는데, 그러지 말고 이과 가는 게 취직엔 더 좋을 거라고 조언을 해서 그런 건가. 것도 아니면, 회사 일이 힘들다고 얼핏 말할 때 당장 그만 두게 할 것을, 참아보겠다니 그냥 둬서 그랬을까. 왜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내 자식, 용균이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기를 바라, ‘공부하라’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는데. 대학까지 가르치면 이제 다 키웠거니 생각했는데. 회사라면 직원 안전 정도는 기본으로 지켜줄 거라 믿었는데. 배신한 건 어미인 나인가, 이 사회인가.

이름 따윈 버리고, 오롯이 ‘용균이 엄마’로만 살기를 작정한 김미숙(51)씨의 머릿속은 지금도 자책으로 가득하다. “비정규직은 목숨 값이 부품 값보다 못하다”는 이 사회의 무자비함에 치를 떨고 분노하지만, 왜 그걸 자식 먼저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됐는지 “내가 너무 무지했다”며 고개를 떨군다.

지난해 12월 11일 새벽 6시30분, 경찰의 전화를 받고서 남편과 함께 경북 구미의 집에서 충남 태안으로 달려갈 때도 아들의 상태가 그 지경인줄은 몰랐다. ‘상태가 위중한가 보다’ 불길한 마음으로 태안의료원 응급실을 뒤졌지만, 아들은 없었다. ‘분명히 여기에 있다고 했는데 왜 없나.’ 그렇다면 마지막 한 곳, 영안실. 관 같은 서랍 안에 아들이 있었다. 생전 아들은 여드름으로 고생해 누가 손바닥으로 얼굴 만지는 걸 싫어했다. 엄마는 살아있을 때 아들에게 그랬듯 손등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아들이 맞았다. 다른 건 싸늘한 냉기.

“시신 훼손이 심하다고 몸은 보지도 못하게 말리더라고요. 바닥을 뒹굴며 울었는데, 왜 나는 기절도 안 하는지.”

김용균(사망 당시 24세)씨는, 원청업체인 한국서부발전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불과 입사 석 달 만이다. 한밤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중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끼어버렸다. 아들이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줄을 엄마는 몰랐다. 알고 보니 이 사회에서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었다. 그러면 안전은 누가 책임지나. ‘우리 소속 노동자가 아니니까’라는 원청업체와 ‘내 시설이 아니니까’라는 하청업체 사이에서 책임은 실종됐다. 그래서 ‘위험의 외주화’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지난 8월 “조사 결과 김용균씨는 작업 지시를 너무나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라고 밝혔으니, 얼마나 애달픈 죽음인가. “그런데도 책임 지는 사람이 하나 없잖아요!” 엄마의 목소리는 피울음 같다.

가슴을 치며 엄마는 오늘도 말한다. “용균아, 나는 너다. 너는 나고. 엄마를 통해서 네 분노를 모두 다 쏟아내라. 꿈에서라도 나와서 말을 해줘. 그럼 엄마가 다 할 테니.”

그 뜻을 이룰 김용균재단 출범(10월 26일)을 앞둔 ‘용균이 엄마’ 김미숙씨를 7일 만났다.

 ◇병치레 잦아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랐던 아들 
아들을 잃은 이후, 엄마 김미숙씨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용균이 엄마 밖에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미소 지어도 그의 눈에는 슬픈 물기가 어렸다. 박형기 인턴기자
 -구미를 떠나 이사를 했다고 들었어요. 

“그동안은 주로 비정규직 쉼터 ‘꿀잠’에서 지냈어요. 그러다가 아예 서울로 올라왔어요. 아직도 우리가 원하는 게 이뤄지지 않았으니까요. 책임자 처벌도 안 됐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드는 것도 안됐고요.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가 당정, 한국서부발전과 함께 만든) 합의안도 문서뿐이고요. 그러니 그런 것들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지 확인해야 해요. 그런 활동을 함께 하려고 5월에 집을 옮겼어요.”

합의안에는 연료ㆍ환경 설비 운전 분야는 공공기관의 정규직화를 조속히 매듭 짓겠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김용균씨 생일이 12월 6일이죠. 

“네, 구미에 있는 병원에서 낳았어요. 용균이 할머니는 마당에 호랑이가 들어오는 꿈을 꿨대요. 저는 하도 이거 저거 꿔서 어떤 게 태몽인지 모르겠는데, 기억나는 건 밤나무 밑에서 밤을 주운 꿈이에요.”

 -어릴 때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병치레를 정말 많이 했어요. 갓난애기 때는 열이 펄펄 끓어서 병원에 가기도 많이 했죠. 감기도 달고 살았어요. 그래서 공부는 안 해도 되니 아프지 말고 우리 곁에 건강하게 있는 게 효도라면서 키웠어요. 세상을 많이 느끼고 자유롭게, 또 여유롭게 살길 바랐죠.”

 -이름은 누가 지어준 건가요? 

“용균이 친할아버지요. 처음에는 항렬을 따라서 다른 이름을 갖고 오셨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하니 또 주신 이름들 중에 고른 게 용균이에요. 시아버지한테 이 이름으로 하면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든다는 뜻이라고 하시더군요. 녹일 용(镕)에, 고를 균(均)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쓰여서 명이 짧아질 줄 알았다면 절대로 용균이란 이름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용균씨의 죽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다시 전면에 떠올랐으니 말이다. 엄마는 허망하고, 참담하고, 뭐라 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거다.

 -어릴 때 용균씨는 뭐가 되고 싶어 했나요. 

“딱히 없었어요. 우리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해본 적 없고요. 어느 정도 크고 나니까 관심 있어 하는 게 역사였어요. 그건 저와 닮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용균이는 문과를 가서 4년제 대학을 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취업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더라고요. 요즘은 정규직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2년제는 취업 문이 더 넓다고 하니 전문대를 가는 게 어떠냐고 해서 전문대에 들어갔죠.”

여기까지 말하다가 엄마는 다시 불행으로 돌아갔다.

“회사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금형(금속 거푸집)을 다루는 일만 위험할 수 있으니 하면 안 된다고 했을 뿐이에요. 정말 제가 모르고 산 세월이죠.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부모가 어떻게 그렇게 무지하게 애를 세상에 내보냈는지. 정말 제 잘못인 거 같아요. 기업에서는 노동자를 사람이 아니라, 마치 없어지면 채워 넣을 수 있는 일회용 부품처럼 여겼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나… 그걸 못 막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요.”

엄마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고,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위로가 되겠나.

“저는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만의 것인 줄 알았어요. 내가 목소리 내고, 내가 막지 않으면 나한테 돌아오는 걸 몰랐어요. 정치가 나와 직결돼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이 다 나한테 온 거예요.”

 ◇사고 한달 반 전 예비군 훈련 때 본 게 마지막 
올해 2월 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용균씨의 빈소에 시민들의 추모 메모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용균씨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뒤에 작년 9월에 (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 입사했죠. 

“처음엔 한전에 들어가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토익 시험도 보고,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그랬죠. 일단 기업에서 원하는 자격을 갖춰야 하니까요. 그런데 한번에 한전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으니 경력을 쌓아서 입사를 하자 싶었던 거죠. 그래서 7개월 동안 전국을 돌면서 수십 군데 시험을 봤어요. 그러다가 김천에 있는 회사에 최종합격 했죠. 그런데 출근하라는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알아 보니 회사를 증설하려던 계획이 실행 되지 않아서 채용이 무산됐더라고요. 그 회사에서 미안하니 추천해준 곳이 (서부발전 협력사인) 한국발전기술이었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직장이 태안이니까 구미와 엄청 멀잖아요. 용균이한테 ‘맨날 엄마, 아빠하고 붙어 있다가 떨어져 살 수 있겠어? 그래도 한번쯤 그렇게 살아봐도 돼. 그런데 힘들면 당장 와’ 하고 말해줬죠. 부모 떨어져 사는 걸 걱정했지, 어디서 다치고 떨어지고 치이고 이렇게 되는 건 생각도 안 했어요.”

 -입사하고는 어땠나요? 

“용균이가 회사에 들어가서 처음에 이틀간 교육을 받더니 괜찮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애하고 저하고 일과가 겹치질 않아서 통화를 자주 못했어요. 저는 공장에서 야간에 컴퓨터 부품 불량 체크하는 일을 했거든요. 그나마 통화했을 때 용균이가 점검하러 다니는 거리가 멀어서 힘들다는 정도만 말을 했죠. 저도 비정규직이었지만, 차별 당하는 일을 그리 겪지 못해서 비정규직이 왜 나쁜지 몰랐어요. 그렇게 위험한 일에 내몰리는 줄도 몰랐고요.”

 -용균씨가 힘들다는 티는 많이 내지 않았나 봐요. 

“입사하고 한달 반쯤 됐을 때 예비군 훈련 때문에 구미에 왔었어요. 몸이 많이 말랐더라고요. 3일간 있었는데 그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힘들대요. 그래서 그러면 그만두라고 했죠. 그랬더니 조금만 더 노력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그렇죠. 살아서 본 건 그게 마지막이죠…”

엄마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용균씨가 생전에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는 운동에 동참을 했다는 게 나중에 알려졌죠.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 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도 있었고요.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몰랐죠. 사고 나기 열흘 전에 찍었다는데. 용균이 죽고 나서 동료가 피켓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자기가 처한 환경을 바꾸고자 용균이가 원청에 스물여덟 번이나 요구를 했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 피켓을 든 거였어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내가 빼내지 못한 것도,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막아내지 못한 것도 너무 아파요. 그거 생각하면 내가 밥을 먹어도 미안하고, 살아 있는 것도 미안하고…”

엄마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은 게 새벽 6시 반쯤이라고요. 

“애 아빠가 잘 때 예민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요. 새벽 6시쯤 문자가 두세 번 왔는데 못들은 거죠. 그러다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깬 거예요. 애 아빠가 전화를 받고 저한테 쫓아왔어요. 저는 야간에 일을 하니까 애 아빠하고 따로 자거든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용균이한테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태안에 거의 도착할 때쯤 경찰에서 다시 태안의료원으로 가보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응급실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영안실에 있었던 거예요. 서랍장 같은 데서 아이를 꺼내는데 머리부터 나오더라고요. 머리 모양을 보니 아들이었어요. 몸은 비닐로도 싸여있고, 흰 천으로도 싸여있고요. 우리는 아이 만질 때 늘 손등으로 만졌거든요. 쓰다듬어 보니 아들 피부랑 똑같아요. 그런데 차가워졌더라고요. 아이를 더 살피고 만지려고 하니 못하게 하더라고요.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소리 듣지 못했느냐면서. 훼손 상태가 너무 심하다고 하더군요. 그거, 들으셨지요.”

기사 몇 줄로 전해지는 것과, 엄마의 마음은 천지 차이일 거다.

“저희도 그래서 겁이 나서 보지를 못했어요. 복도로 끌려 나오다시피 해서 나왔어요. 그리고는 나중에 한번 더 봤지요. 경찰서에서 애 아빠가 용균이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아이가 까매져서 맞는지 모르겠다고 해서요. 부인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다시 갔는데 두 번 봐도 맞아요. 그래서 다시 경찰서에 가서 인정을 하고… 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된 애를 보면 까무러치기도 하던데 왜 우리는 그게 안 되는지, 바닥을 뒹굴면서 울어도 기절은 안 하더군요. 힘이 빠져가지고 있는데 하청업체 사장인지, 이사인지 회사 사람 둘이 왔더라고요. 정말 죄송하다면서 하는 말이 용균이가 성실한 애였는데 고집이 좀 셌다고. 그래서 가지 말란 곳에 가서 하지 말란 일을 했다고요. 회사에서 들어놓은 보험으로 해결을 해주겠다면서. 애가 그렇게 됐다는 게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부모한테 한다는 말이 저거 밖에 없나. 무슨 보험은 보험인가. 황당했어요. 나중에 몰래 아들 동료들에게 확인해보니 사측 말과 달리 무조건 가서 일하게 돼있다고 하더군요. 사측이 거짓말로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업무수칙을 잘 지켜서 당한 죽음 
김미숙씨는 아들 용균씨를 보낸 뒤 맛도 잃어버렸다. “뭘 먹어도 맛이 없어요. 용균이가 나라고 생각하고 사니, 용균이가 좋아하던 음식도 먹어보려 하지만 먹지를 못하겠어요.” 박형기 기자
 -특조위에서 진상조사 결과가 나왔죠. 

“업무수칙을 다 지키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발표했죠. 용균이 잘못이 아니라는 증거가 확실하게 나왔으니 안도감이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는 생각에….”

엄마는 다시 마음이 무너졌다.

 -용균씨가 일하던 공장에도 가보셨죠. 

“시민대책위 사람들, 용균이 동료들하고요. 제가 용균이가 업무를 하러 다니던 동선 그대로 재현해달라고 했어요. 처음엔 샤워실, 탈의실, 용균이가 쓰던 정말 작은 사물함을 봤어요. 컵라면, 고장 난 손전등, 건전지, 슬리퍼 이런 게 있더라고요. 현장을 보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게 의미하는 게 뭔지 그때는 몰랐어요. 그러곤 현장에 갔는데 아무 데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탄가루가 눈처럼 쌓여서 분진이 날리고요. 용균이가 일했던 컨베이어벨트 쪽은 좁고 어두웠어요. 점검할 때 최대한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어 보고를 올려야 했대요. 회전체(석탄 운반용 컨베이어벨트를 받치고 있는 설비)가 돌아가는데 낄 위험에 노출이 돼서 일을 한 거예요. 안전장치로 풀코드(비상정지장치)라는 게 있는데 평소에는 줄이 늘어져 있어서 쓸 수도 없고 그것마저도 원청 허락이 있어야 당길 수 있다니 말이 돼요? (게다가 2인 1조가 아닌 혼자 점검을 해 구제해 줄 이도 없었다.) 정말 미친 것들 아닌가요. 용균이 죽고 나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고 탄자루에 시신을 수습하라고 그랬대요. 그 얘기를 듣고 동료들에게 탄자루는 깨끗하긴 했냐고 하니 새 것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탄자루를 쓰라고 할 수 있을까. 4시간 방치 한 것도 모자라서 수습도 그 모양으로 하다니.”

 -이후에도 비슷한 사고가 이어졌어요. 

“이런 사회 구조에서는 약자들이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어요. 자연재해로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인재는 막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저는 그런 현실을 몰랐어요.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졌고, 왜 이렇게 나라가 험악하게 됐는지 현대사 책도 보고 있어요.”

뒤늦게나마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김용균법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법으로는 용균씨의 죽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용균씨의 연료ㆍ환경 설비 운전 업무나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작업 중 사망한 김모군의 업무는 도급 금지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정규직은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문제를 제기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비정규직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여전히 시키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래서 김용균법에 김용균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저는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2월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대통령이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시되도록 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또 말뿐인 게 아닌지 걱정돼요. 저는 지금 한 산, 한 산 어렵게 넘고 있어요.”

 -그렇게 힘든 일인데도, 산을 넘는 이유가 뭔가요. 

“저는 사는 이유가 이것 밖에 없어요. 자식이 있어야 미래도 있고 희망도 있죠. 이제 내 삶에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 같은 아픔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일도 그만 뒀어요. 회사에서는 휴직 처리를 해줄 테니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제는 제가 못하겠더라고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세월호 엄마들, 그 세월 어떻게 견뎠는지 
김미숙씨의 휴대폰에 달린 리본 고리들. 세월호와 스텔라데이지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주황색 리본, 그리고 용균씨를 기리는 보라색 리본이다. 박형기 기자
 -용균씨가 꿈에 나타난 적 있나요? 

“애기 때 모습으로 나오더라고요. 어릴 때 정말 제 판박이었거든요. 그러다 최근에 제 아빠 꿈에 나타났대요. 그런데 용균이가 회사 작업복을 입고 있더래요. 그래서 애 아빠가 ‘너 요즘 어디에 있니’하니까,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있다’고 그러더라고 해요. 애 얼굴이 어때 보였냐고 하니 편안해 보였대요. 애 아빠는 꿈에서 잘 있는가 보다 하고 깼다고 해요. 용균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많이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효도하고 기쁨을 줄지 생각하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죽어서도 부모 걱정하지 말라고 좋은 모습을 보여줬나 봐요.”

 -세월호 엄마들도 만났지요. 

“네, 그 분들은 벌써 5년이나 보냈는데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싶어요. ‘그 분들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나보다 먼저 아픈 세월을 겪은 사람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죠. 만나면 어떻게 살았는지 그걸 제일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물으니 그냥 산다고 하더군요. 한 엄마는 자기도 애가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돼 너무 힘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아직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용균이 엄마도 살 수 있다고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더군요.”

 -부군도 몸이 편치 않다고 들었어요. 

“회사를 잠시 쉬던 중에 심근경색이 갑자기 와서 그 이후로는 아예 회복하는 데 집중을 했죠. 그래서 10년 정도 제가 생계를 책임졌어요. 그런데 용균이 일 이후에 밥도, 약도 잘 안 챙겨 먹어서 상태가 더 안 좋아졌죠. 저도 제대로 보살피지를 못하고요. 반찬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하지만 이 아픔을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저한테는 애 아빠잖아요.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사는 날까지 둘이 보듬으면서 살자고 그랬어요.”

 -10월 26일에 김용균재단이 만들어지죠. 

“이 사회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용균이 죽기 전에 믿었던 나라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밝은 면만 봤다가 지금은 완전히 어두운 면만 보고 있지요. 조롱 당하고 짓밟힌 느낌이에요. 그래서 용균이를 기리기는 것뿐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 우리나라를 안전하게 만드는 투쟁을 하려고 만드는 재단이에요. 산재 피해 가족이나 앞으로 일어날 사고의 피해자 가족과 연대해서 일을 할 거예요.”

 -김용균재단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전태일처럼 우리 용균이가, 짧은 생을 왔다 갔지만 길게 남겨지길 바라요.”

 -최근 출간한 투쟁 백서 제목은 ‘김용균이라는 빛’이죠. 어떤 빛일까요. 

“세월호 참사나, 구의역 사고 피해자들이 저는 다 빛이라고 생각해요. 어둠을 밝히는 빛. 용균이도 그렇죠. 우리의 투쟁이 얼마나 절실한가에 따라 그 빛은 흐려지기도, 더 세지기도 할 거예요. 용균이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도 빛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이런 아픔 겪게 하지 않으려 
김미숙씨가 아들 용균씨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다. 김미숙씨는 “아들이 꿈에라도 나와 원하는 걸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형기 인턴기자
 -자그마한 체구에 말도 조곤조곤 해서 조용한 성격이신 듯해요. 그런데 사고 이후 기자회견이나, 국회 공청회에도 참석해서 마이크를 잡고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도 만나러 가실 정도로 활동 폭이 넓어요. 

“저는 그동안 마이크를 잡아본 곳이라곤 노래방 밖에 없어요. 마이크만 보면 떨었죠. 하지만 자식이 이렇게 엉망으로 죽었는데 내가 어디 있어요. ‘용균이 엄마’ 밖에 없는 거지. 저는 이제 못할 게 없어요.”

 -그동안 살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도 용균씨 죽음 이후로 바뀌었겠지요. 

“이전에는 자식에게 먹을 것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아등바등 돈 모으며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맛있는 걸 입에 넣어줄 애가 없어요. 그러니 내가 잘 살고 싶은 이유도 없죠. 이제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애가 하려던 숙제, 바라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살아야겠다고 바뀌었어요. 무슨 보상금 이런 얘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돈이 무슨 소용인가요. 자식 핏값으로 받은 돈 부모가 어떻게 건드려요. 쓸 수 없는 돈을 준거예요. 정말 누구도 이런 아픔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그 마음으로 사는 거다. 내 자식 처참하게 잃은 고통을 아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는 건 이런 뜻일 거다. 용균이 엄마 김미숙씨 눈에는 미소 지을 때도, 말을 할 때도, 생각에 잠길 때도 늘 물기가 어렸다. 눈동자는 이미 슬펐다.

김미숙씨 휴대폰에는 고리가 세 개 달려 있었다. 노란 리본, 주황 리본, 보랏빛 리본. 각각 세월호 참사, 스텔라 데이지호 희생자, 그리고 용균씨를 기리는 것이었다. 그건 아들을 잃고 세상의 엄마로 살겠다는 결심 같아 보였다.

“저하고 있으면 별별 얘기 다 하는 다정한 아이였어요. 애교도 많고요. 사춘기 때 빼고는 커서도 저한테 뽀뽀를 해주는 아들 같은 딸, 딸 같은 아들이었죠. 버릴 게 없는, 정말 아까운 아이에요. 엄마가 놓쳐버린 것 같아요. 저는 큰 게 행복이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많은 욕심 부리지도 않았죠. 그저 평범하게 가족과 소소한 행복 누리는 걸 큰 행복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이것마저도 저한테 허락이 안 된다니…”

엄마에게 이런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는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아니, 정상이 아니다. 용균 엄마의 목소리에 세상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림자. 사진으로나마 먼저 보낸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박형기 인턴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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