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음반 내고, 한국서 신인 아이돌로 다시 데뷔도
“배달 음식 다양해 좋아” 한국 ‘먹방’까지 인기
일본 가수 루안(16)은 나이는 어리지만 배짱은 두둑하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와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기타를 들고 길거리 공연도 했다. 홍인기 기자

“겨우 꺼내 보는 서툰 말투, 오래 지켜왔던 내 마음인 걸~”. 소녀의 밝은 목소리가 경쾌한 비트에 흥을 더한다. 씨스타의 히트곡 ‘터치 마이 바디’ 등을 만든 유명 작곡가팀 블랙아이드필승이 작곡했다. 노래 제목은 ‘삐’ 소리를 뜻하는 ‘빕 빕(BEEP BEEP)’. “나를 봐 줄래”란 후렴구에 맞춰 양 손가락으로 X자 모양을 만드는 춤이 트와이스의 ‘TT춤’을 떠올린다.

아니나 다를까. ‘TT’의 안무를 맡은 리아 킴이 이 곡의 춤을 짰다. 블랙아이드필승에 리아킴, K팝 유행의 선봉에 선 제작자들이 나선 이 곡의 주인은 한국 가수가 아니다. 일본 가수 루안(16ㆍ大山琉杏)이다. 그는 한국 창작자의 곡을 받고, 안무가의 춤을 익힌 뒤 한국어로 부른 노래 ‘빕 빕’을 지난 7월 31일에 냈다. 같은 달 1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발표해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때였다. 한국에선 일본 조처에 반발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 “한국어와 일본어로 양국 뉴스 본다”는 일본 가수

루안의 신곡 발표 기사엔 ‘악플’이 달렸다. “처음엔 속상했어요. 하지만 어떤 네티즌이 ‘왜 하필 이 시기에’란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걱정해주는 것 같았어요. 감사했고요. 이미 곡 발표를 두 번이나 미뤄 더는 공개 시기를 늦출 순 없었어요.”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루안은 “K팝과 한국을 좋아해” 한국 활동에 욕심을 냈다고 했다. 고교 방학을 맞아 루안은 지난달 한국을 찾았다.

한국어 노래를 낸 이 일본인 가수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루안은 1년 전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면서부터다. 방탄소년단 노래와 K팝 아이돌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 ‘주간 아이돌’이 그의 한국어 교본이었다. 루안은 한국어로 쓴 가사(미발표)도 6개가 있다고 했다.

일본 아이돌그룹 AKB48 출신 다카하시 쥬리(사진 왼쪽)는 한국 신인 아이돌그룹 로켓펀치로 지난 8월에 데뷔했고, 그와 일본에서 같은 그룹으로 활동했던 다케우치 미유는 한국 연예 기획사와 계약해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울림엔터테인먼트 제공, 미유 사회관계망서비스

루안은 일본에선 직접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2017년 자작곡으로 꾸린 앨범 ‘스파이스 13 어쿠스틱’으로 데뷔했다. 그는 ‘일본 국민 밴드’인 미스터칠드런 등이 있는 토이팩토리 소속 뮤지션이었다. 일본 인기 TV 애니메이션 ‘3월의 라이온’ 엔딩 곡을 불러 이름도 알렸다. 일본의 싱어송라이터가 어떻게 한국에서 K팝 아이돌을 꿈꾸게 됐을까. 루안은 “어려서부터 춤을 좋아했다”라며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나와 내 음악이 얼마나 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도전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함께 음악 활동을 하면서 루안의 일상도 변했다. “한국과 일본 관련 뉴스는 꼭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뉴스를 모두 찾아봐요. 한 나라의 뉴스만 보면 한쪽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되니까요.”

루안처럼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가수가 한국에서 ‘K팝 신인’으로 활동에 나서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일본 국민 아이돌그룹’인 AKB48 출신 다카하시 쥬리(22)는 8월 한국에서 K팝 신인 그룹 로켓펀치 멤버로 데뷔했다. 한국으로 치면 여자친구나 트와이스 멤버가 그룹 활동을 중단하고 일본에서 신인 그룹으로 데뷔한 셈이다. 한일 갈등이 고조되는 민감한 시기에 일본인이 K팝 가수가 돼 한류를 전파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J팝 시장을 뛰어넘어 K팝을 발판 삼아 더 큰 무대로 발돋움하려는 열도 인재들의 인식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먹방' 크리에이터 도로시(사진 위)와 양수빈의 유튜브 채널엔 일본 10~20대가 몰린다. 도로시, 양수빈 영상 캡처
◇”한글로 먹방 쳐 영상 찾아” 드라마, K팝 이은 신한류

양국 관계는 얼어붙었지만, 일본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류를 소비하고 있다. 일본 10~20대 사이에선 한국의 ‘먹방(먹는 방송)’이 인기다. 일본 도쿄에 사는 회사원 메구미 히구치(25)씨는 유튜브로 ‘먹방’을 보며 저녁을 먹곤 한다. 메구미씨는 본보에 “도로시와 양수빈 채널을 즐겨 본다”고 말했다. 둘 다 유튜브 구독자 수 230만명을 넘어서는 국내 인기 ‘먹방’ 진행자다. 한국이 일본보다 집에서 시켜 먹는 배달 음식 문화가 발달해 관련 ‘먹방’ 콘텐츠를 특히 흥미로워했다. 루안도 “유튜브에서 한글로 먹방을 친 뒤 영상을 찾아보는 학교 친구들이 많다”라고 했다.

온라인에서 ‘먹방’이 유행이라면, 밖에선 치즈닭갈비와 치즈핫도그 등 한국 음식이 인기다. 일본에서 드라마와 K팝이 1차, 2차 한류를 이끌었다면 이젠 음식이 3차 한류를 촉발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6월 공개한 일본 방한 관광객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은 방한의 주요 고려 요인으로 ‘음식 탐방’(42.4%)을 가장 많이 꼽았다. 황선혜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비즈니스센터장은 “일본의 40~50대는 한일 정치적 관계를 의식하지만, 10~20대는 다르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3차 한류 세대는 SNS로 한국 사람과 소통하고 이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황 센터장은 “그들은 주체적으로 한류 소비를 이끈다”며 “양국 관계의 영향도 크게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나 정치나 경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토리(さとりㆍ득도) 세대’가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한류를 즐긴다는 설명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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