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새로미 작가 인터뷰 
[저작권 한국일보]‘뭘 잘했다고 울어?’, ‘말 예쁘게 하자’, ‘정없게’... 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허새로미 작가가 스케치북에 쓴 ‘잘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아닌, 공격성을 내포한 한국어’들을 적어서 보여주고 있다.그는 여기에 '한국어 고통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진실보다 남의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권도 있어요. 한국에서는 그걸 ‘기분’이라고 부르죠.” 아마도 한국인이 감정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기분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미국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대화 한 토막에 갑자기 등장했다. 허새로미(36) 작가는 “한국인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기분의 정의를 보는 것은 낯선 경험”이라며 “기분을 지켜주는 것이 누군가의 품위와 연관될 정도로 중요한 사회적 의식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영어로 해석한 ‘기분’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봤을 때만 가능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허 작가는 한국에서 토플을 가르치다 미국에서 영어 교육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블로그에 다른 문화권의 언어를 배우면서 느낀 한국어와의 차이에 대한 글을 연재하다 이를 묶어 최근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책에는 ‘한국어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영어수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1일 한국일보와 만난 허 작가는 “위계적인 용어가 많은 한국어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한국은 고맥락 문화권에 속한다. 고맥락 문화에서 의사소통은 표현된 내용으로부터 상대방의 진의를 유추하는 단계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말은 우회적이고 애매하며, 함축적이다. 소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듣는다’는 것이 고맥락 문화를 반영한 한국 언어문화의 특징이다. 반대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저맥락 문화권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저작권 한국일보] ‘뭘 잘했다고 울어?’, ‘말 예쁘게 하자’, ‘정없게’... 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허새로미 작가가 스케치북에 쓴 ‘잘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아닌, 공격성을 내포한 한국어’들을 적어보고 있다.그는 여기에 '한국어 고통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우회로를 택한다. ‘서운하다’, ‘섭섭하다’와 같은 말이 그런 경우다. 그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 중인 다큐멘터리에서 특히 그런 부분을 느꼈다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사람들에게) ‘서운하더라고요’라는 말을 했어요. 나 같으면 좌절감, 배신감을 느끼고 슬플 터인데 이 사람들은 정규직 쪽에 그런 말을 못하는 거에요. 결국 ‘서운하다’가 되는 거죠. 아우 (꾹 참고 있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는 자세를 취하며) 후… 이런 느낌으로요. 이런 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는 딱 맞는 말이 없다 보니 맥락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쓰게 되죠.” 감정을 나타내는 한국어 가운데 상당수가 부정적인 표현에 치우쳐 있기도 하다. 2006년에 한국어 감정단어 434개 가운데 72%가 불쾌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연구결과가 한국심리학회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동등하지 않은 관계의 대화 상대에게 부지불식간에 사용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이 어린 사람이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두고 연장자가 ‘싸가지가 없다’고 표현하거나,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는 불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는 아이에게 부모가 ‘뭘 잘했다고 울어’라고 야멸차게 말하거나, 말다툼을 하던 여자친구에게 남자친구가 ‘말 예쁘게 해’라고 다그치는 상황은 듣는 이에게 느닷없는 당황과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허 작가는 이런 말들에 ‘한국어 고통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잘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아니거든요.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영어로 잘 번역한다고 해도, ‘You are being disrespectful(네가 나를 존중하고 있지 않아)’인데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거든요. 그냥 ‘나 너 싫어’라는 거에요. 말하는 목적 자체가 남을 모욕하기 위한 공격성을 담고 있는 것이에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걸 그냥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거죠. ‘뭘 잘했다고 울어’하면 ‘꾸짖음과 사랑이 담겨있는 말인가’ 하면서요. 하지만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허 작가는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어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 나갈 수 있다고 봤다. “영어 회화시간에 학생들에게 ‘지난 주에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면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 이야기에 누가 관심 가지겠어’라며 지레 생각하고 요새 유행하는 것들처럼 남이 관심을 가질 만한 걸 이야기 해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 검열을 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언어를 바꿔서 아무 말이나 해 보라고 주문해요. ‘파스타 소스를 실수로 두 박스나 주문했다. 앞으로 이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할 지 모르겠다’라는 사소한 이야기라도요. ‘기분이 별로였어’와 같이 맥락을 생략한 파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어떤 일이 나를 어떻게 느끼게 했는지 자기 서사를 말하게 하는 거죠. 이것을 한국어로 남에게 이야기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힘들지만, 언어를 바꾸면 나의 이야기를 훨씬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거에요.”

글ㆍ사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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