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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진흙탕 싸움에도 유머가 필요하다

입력
2019.10.0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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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의 모기업 다임러그룹의 디터 제체 회장이 은퇴하자 독일의 라이벌 자동차 기업 BMW는 유튜브에 광고 한 편을 내보냈다. ‘마지막 날’이란 제목의 영상이었는데 직원들과 기념 셀카를 찍고, 사원증을 반납한 뒤 박수를 받으며 회사를 떠나는 제체 회장(대역 배우)의 모습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그를 집까지 태운 벤츠 차량과 기사가 떠나자 반전이 시작된다.

‘마침내 자유롭게 됐다’는 문구와 함께 차고 문이 열리면서 제체 회장이 몰고 나가는 차는 벤츠가 아닌 BMW의 스포츠카이다. 경쟁업체를 조롱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결말은 훈훈하다. ‘수년간 경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제체 회장, 고맙습니다’란 자막이 깔린다. 메르세데스-벤츠도 가만 있진 않았다. “친절한 제안은 고맙지만 제체 회장은 이미 벤츠의 전기차를 타기로 결정했다”고 응수했다.

세계 자동차 업계 최대 라이벌인 두 회사가 상대를 비꼬는 도발적인 광고를 내보낸 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BMW가 창립 100주년을 맞자 메르세데스-벤츠는 신문 지면에 축하 광고를 실었다. ‘100년간의 경쟁에 감사를 표한다’는 문구를 담았다. 물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이전 30년은 사실 좀 지루했다’고 썼다. 경쟁업체의 오랜 역사를 칭송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BMW 탄생 30년전인 1886년 이미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벤츠의 역사를 뽐낸 것이다.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두 회사가 어떤 경쟁을 벌였는지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신기술을 내놓았고, 조금 더 먼저 혁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두 회사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세계 최고의 차를 만든다는 각자의 목표와 자존심이 깔려 있다.

우리에게도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라이벌 기업이 있다. TV 분야 세계 1,2위인 삼성전자와 LG전자다. 라이벌이니 사이가 꼭 좋을 순 없겠다. 출발부터가 그랬다. LG가 1958년 금성사를 세워 전자사업을 시작하자 10년쯤 뒤인 1969년 삼성도 삼성전자공업을 출범시켜 뛰어들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사돈인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에게 “전자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구 회장이 화를 낸 일화는 유명하다. 돈이 되니 사돈이 하는 사업에까지 뛰어든다는 이유였다.

라디오, TV, 냉장고, 에어컨을 국내 최초로 생산한 LG에 맞서 삼성은 컬러 TV를 처음으로 내놓으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술 경쟁이 격화되면서 감정 싸움과 소송도 난무했다. 두 회사는 1992년 브라운관 TV 특허를 놓고 소송을 벌였고, 2012년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 관련 소송으로 맞붙었다. 두 회사가 운영하는 프로야구단은 한동안 선수 트레이드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었다. 그리고 올해 양사는 초고화질 ‘8K TV’ 기술을 놓고 서로 상대 제품이 ‘가짜’라며 진흙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총칼 없는 전쟁’을 벌이는 두 회사에게 ‘같은 나라 기업끼리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사이 좋게 지내라’는 건 억지에 가깝다. 둘이 싸울수록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니 소비자로선 오히려 반길 일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건 라이벌에 대한 존중과 유머의 부재다. 올해 초 벤츠와 BMW는 차량공유 사업에 10억 유로를 공동 투자하기로 했다. 이 분야 선두 기업인 우버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자존심 강한 두 회사의 이례적인 협업은 급변하는 산업 지형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평소 상대 기업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경쟁하는 세계 1,2위 기업에게 싸움과 비방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그래도 유머와 위트, 상호존중은 필요해 보인다. 감정 싸움에 매달리다 더 큰 공동의 이익을 도모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요즘 기업 분쟁이 늘고 있는데, 유머 대신 사생결단의 독설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치ㆍ사회적 갈등을 닮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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