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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우창 봉기(10.10)

입력
2019.10.1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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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단 하루 만에 우창 전역을 장악하고 11일 후베이 독립정부 수립을 선포한 우창봉기 주역들. 위키피디아.
1911년 10월 10일 단 하루 만에 우창 전역을 장악하고 11일 후베이 독립정부 수립을 선포한 우창봉기 주역들. 위키피디아.

10월 10일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신해혁명 기념일’이고, 중화민국(대만)의 건국기념일인 ‘쌍십절’이다. 쑨원(孫文)이 난징에서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한 것은 1912년 1월 1일이지만, 근대 공화국 수립 자체보다 수천 년 전제 왕정을 허물기 시작한 날을 기점 삼은 것이다. 그 기점의 기점, 즉 신해혁명의 신호탄이 1911년 10월 10일 저녁 8시, 양쯔강 중류 후베이성 우창(武昌)에서 올랐다. 우창봉기였다.

오늘날의 우창은 성도 우한의 한 개 구지만, 당시에는 우창이 성도였다. 충칭(重慶)과 상하이를 잇는 철도와 수운의 결절지이고, 1858년 텐진조약 이래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5개국 조계가 운영되던 국제도시였다. 이름처럼 신식 군수물자 중심의 산업 거점 도시이기도 해서, 시민의식이 상대적으로 덜 봉건적이었고 총독 관할 주둔군인 신군(新軍)체제의 엘리트 청년들이 많았다. 아편전쟁 이후 이어진 반봉건-반외세 비밀결사단체들은 현지 총독 관할 하의 주둔군 청년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즉 우창은 근대 민족주의 혁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외세에 철도를 넘겨주지 말자는 운동인 ‘보로(保路)운동’은 반 외세의 상징적ㆍ실질적 운동이었다. 1911년 5월 쓰촨(四川)성에서 시작된 철도조차권 외세 이양 반대 시위가 유혈 봉기로 확산됐다. 서부 내륙 쓰촨성은 금, 은, 구리, 철 등의 자원이 풍부한 광업지역이었다. 현지 계엄군만으로 폭동 진압이 힘들어지자 청 조정은 인근 성에 진압군 차출 파병을 지시했다. 후베이의 군 지휘부와 병사 일부도 파병됐다. 그 공백을 틈타 우창봉기가 시작됐다.

밤 사이 우창 전역을 장악한 혁명군은 11일 새벽 후베이 독립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이후 한 달여 사이 북쪽 산시성부터 남쪽 윈난성까지 16개 성이 혁명에 동참했다. 난징이 함락된 것은 12월 2일이었다.

신해혁명의 주도권이 쑨원 중심의 난징파에게 넘어가고 우창봉기의 리더 황싱(黃興)은 공화정부의 육군부 총장이 됐지만, 불과 두 달 뒤 위안스카이의 반동으로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에 그쳤다. 혁명 100주년이던 2011년 개봉한 영화 ‘신해혁명’에서, 홍콩 반환 전 대영제국훈장(1989)을 받았고 반환 후엔 열렬한 친중파로 변신한 영화배우 청룽(成龍)은 ‘부르주아혁명’의 주역 쑨원이 아닌 혁명군 지도자 황싱 역을 맡았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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