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병원장-브로커 녹음파일 입수]
경찰 “보험사에 진료비 과다수령” 병원 압수수색ㆍ수사 착수
브로커, 병원장 찾아가 해결사 자처… 인맥 과시하며 합의 종용
“보험사 합의금 절반 깎아 9억으로 낮춰줄게” 10% 수고비 요구
9월 4일 인천 남동구의 관절치료 전문병원 원장실에 모인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병원장 2명과 도우미를 자처하며 병원을 찾아온 ‘브로커’ 2명이었다. 병원장이 이들을 만난 이유는 지난달 착수된 경찰 수사 때문이었다.
이 병원은 8월 19일 인천 연수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에서 의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난생 처음 겪는 경찰 수사에 병원장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경찰은 보험적용이 안 되는 운동치료를 물리치료 시간에 포함시켜 병원 측이 보험사에 진료비를 과다수령 해왔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보험사 16곳이 문제 삼은 금액은 모두 18억여원. 병원 측은 그러나 운동치료는 물리치료 이후에 환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해왔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 지 몰라 병원장들은 불안해했다.
병원장들을 돕겠다고 등장한 두 사람은 그런 심리를 파고들었다. 브로커는 병원장을 안심시키는 과정에서 경찰과 보험회사, 브로커 사이의 뿌리 깊은 유착이 의심되는 내용을 다수 말했다. 한국일보는 이날을 포함해 병원장과 브로커 사이에 오간 대화녹음파일 10여개를 입수해 분석했다.
브로커 A씨는 간호사 출신으로 경기도의 중소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B씨는 친인척을 의사로 둔 의료품 납품회사 대표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의료보험사건 해결에 정통한 디자인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팀 라인이 여기저기 깔려 있다. 경찰과 보험회사, 병원 쪽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한 팀이기 때문에 디자인(사건 해결)이 가능하다.”
말로만 떠든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병원장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경찰과 국세청,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보좌관 등 병원 업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관 인사들과 화려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고 과시했다. 그러면서 경찰 압수수색 두 달 전에 병원이 내사 중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도 했다. “우리한테 그런(이번 사건 같은) 정보들이 많이 들어온다. 인맥이 예전부터 죽 있다 보니까 정보가 정확하다. (이번 사건은) 보험사에서 경찰청으로 찔렀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경찰과 보험사를 통해 파악했다는 구체적인 정보 입수경위도 설명했다. “수사팀은 의료분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수사하려면 조사 경험이 풍부한 경찰이나 여러 곳에 자문을 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보를 우리가 받은 거다.”
병원장들이 그래도 미심쩍어하자 A씨는 현직 경찰 C씨 이름을 댔다. 이번 수사와 관련해 C씨와 주고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도 보여줬다. C씨가 전한 내용은 ‘변호사들은 큰 도움이 안 되니, 합의를 하는 게 좋다’는 내용이었다.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의 명함도 보여주면서 보험사와 합의를 안 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병원장들을 계속 압박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관여했던 주요 병원 이름을 차례대로 열거하면서 “병원에선 잘못이 없다고 해도, 보험회사에선 꼬투리 잡을 여지는 있다. 어떤 병원장은 내 말을 안 듣고 법대로 한다고 버티다가 추징금으로 400억원을 맞았다”고 겁을 줬다. 전날 병원장을 따로 만났던 A씨는 이미 “정면돌파를 택했던 어떤 원장님은 병원 다 뺏기고 난리 났다. 합의하지 않으면 국세청이랑 심평원 심사도 나와서 괴로워질 것”이라고 압박한 터였다.
두 사람은 병원 측 입장을 듣기보다는 무조건 합의를 강조했다. 이런 사건은 사건이 굴러가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식이었다. 병원장들이 ‘합의하면 경찰 수사가 무마되는 것이냐’ ‘수사경찰들을 정말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자 두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다. 과거에도 경찰들을 활용해 사건이 잘 해결된 경우가 많았다며 비법을 소개했다. “의료 관련 수사를 하는 경찰들을 움직이는 라인이 있다. 얼마 전에도 이 사람들 20여명이 교육을 받았다. 이 사람들이 (경찰서 곳곳에) 포진돼 있는데, 이들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 내 뒤에는 십 수 년 관리해왔던 ‘인프라’가 있는데 100여명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관리한다.” 한 마디로 평소 관리해왔던 ‘인프라’를 통해서 보험사도 만나고 경찰도 만나면서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들에게 관리비용 명목으로 용돈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병원이 합의에 동의하면 이후 사건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고 했다. 보험회사와 경찰, 병원 측 브로커들이 만나서 사건을 조율하면 나중에 경찰이 묻고 병원이 답해야 할 Q&A(질문지와 답변서)까지 미리 나온다고 말했다. 경찰 쪽 브로커는 현직 경찰이, 보험회사 쪽 브로커는 주로 경찰이나 보험회사 쪽 사람이 맡는다고 전했다. “(합의금에 대한) 협의가 끝나면 처벌수위 정해진 뒤 피의자 조사 들어가는 거다. 경찰은 Q&A대로 질문하기 때문에 수사할 게 없다. 합의금과 형량은 우리가 병원 측에 유리하게 디자인을 하겠다.”
겁을 먹은 병원장들이 무혐의 주장을 접고 합의를 적극 검토할 기세를 보이자 사건을 디자인하려는 두 사람은 본색을 드러냈다. B씨는 “한번 ‘디자인을 해보세요’ 오더를 주면 우리가 디자인한다. 해결되면 (사건 해결을 도와준) 인프라들한테 인사를 해야 한다. 원장님 돈으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금은 보험사에서 문제 삼는 액수의 50% 정도인 9억원 정도로 낮춰볼 테니까, 합의금의 10%인 9,000만원 정도가 수고비로 필요하다고 전했다. B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의료품회사가 병원의 납품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말했던 내용이 민감하다고 의식한 듯 여러 차례 “오늘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병원장들에게 당부한 뒤 헤어졌다.
이틀 뒤 A씨가 디자인 팀을 가동한 결과를 병원장에게 알렸다. “보험사들과 50% 정도까지 합의를 봤다. 9억 정도. 이게 정리되면 경찰 쪽에서 병원장을 기소유예나 벌금형으로 해보겠다는 답이 왔다.” 병원장이 ‘50%는 누구한테 나온 이야기냐’고 묻자, A씨는 경찰 출신의 대형손해보험사 조사실장인 H씨 이름을 거론했다. 디자인 팀에서 H씨와 협의할 사람이 이미 섭외돼 있었다는 것이다.
보험사 조사실장 H씨는 병원 압수수색 다음날인 8월 20일 병원장과 이미 통화했던 인물이다. H씨는 자신은 물론 아내와 장모까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사건 이해관계자였지만 경찰이 압수수색을 할 수 있게끔 이미 참고인 진술까지 마친 상태였다. H씨는 수사 착수 하루 밖에 안 된 사건을 두고 디자인 팀이 말했던 것처럼 “합의를 보는 게 좋다”고 여러 차례 병원 측에 권유했다. 여러 보험사들이 문제를 삼고 있지만, 자신이 중재해서 합의금을 50%까지 낮출 수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변호사를 들이밀어봤자 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경찰에서 변명해도 소용 없다.” H씨는 특히 ‘직원들이 법률을 잘못 알았다’는 취지로 진술하라는 조언까지 했다.
한국일보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H씨는 “현직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길래 설명해줬던 적은 있지만 디자인 팀의 존재는 처음 들어본다. 합의를 언급한 건 처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을 뿐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현직 경찰은 “평소 알던 A씨가 사건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해서 보험사를 통해서 수사상황을 알려줬을 뿐이다. 수사팀에는 연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병원을 수사 중인 연수경찰서 관계자는 “외부에서 경찰수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원칙대로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 팀의 이야기는 이랬다. “사건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맞지만, 압수수색 이후에 병원 측 인사를 만났다. 사회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선의로 만나서 합의를 권유했을 뿐, 금품을 요구하거나 기소유예를 보장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이에 대해 수사기관의 결론을 지켜볼 예정이다. “우리 병원의 형사처벌 유무를 떠나 경찰과 보험사가 병원을 압박해 등쳐먹으려고 했다면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검찰은 경찰과 보험사, 브로커 사이의 유착 의혹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강철원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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