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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네 살 때 ‘길거리 캐스팅’ 강수연 충무로 첫 월드스타 되다

입력
2019.10.05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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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아역배우에서 세계의 스타가 된 강수연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배우 강수연은 네 살 때 연기를 시작해 1980~90년대 충무로 톱 배우로 한국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강수연은 네 살 때 연기를 시작해 1980~90년대 충무로 톱 배우로 한국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수연(53)은 한국영화계가 낳은 최초의 ‘월드스타’였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7)로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여배우상을 수상한데 이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의 연기로 당시 공산권 최고였던 모스크바영화제 최우수여배우상을 받으면서 약관 24세의 강수연은 세계에 내세울 한국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밀양‘(2007)으로 전도연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 이전, 세계 3대 국제영화제(칸, 베니스, 베를린)에서 한국의 영화배우가 상을 받은 유일한 경우(이는 중국의 공리보다 앞선 동아시아 배우 최초의 수상이었다)였고, 세계영화계의 흐름과는 무관한 변방으로 여겨져 왔던 한국영화의 국제적 인식을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트로이카 여배우(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은퇴 이후 정체되어 있던 한국영화 여배우의 계보에 강수연은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1980~90년대 한국영화를 풍미했다.

“어렸을 때 집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길가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너네 집이 어디니?“라고 물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셈이다. 그 남자와 손잡고 집으로 들어가서 부모님께 허락을 구했다.” 아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것이 1969년, 네 살 무렵부터였으니 배우로서 강수연의 경력은 삶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TBC(동양방송) 전속으로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1971)의 주인공 이쁜이를 연기했고, ‘별 3형제’(1977), ‘어딘가에 엄마가’ ‘슬픔은 이제 그만’ ‘비둘기의 합창’(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등 어린이들의 맑고 순수한 모습을 그려낸 다수의 작품에 단골로 얼굴을 내밀었다. 김응천 감독의 ‘깨소금과 옥떨매’(1982)로 보다 성숙한 청소년 연기자의 면모를 보여준 강수연은 KBS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1986ㆍ이 드라마는 강수연이 전학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에 출연, 손창민과 더불어 당대의 하이틴 스타가 되어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영화 '슬픔은 이제 그만'(1978)에서 아이를 업고 연기하고 있는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슬픔은 이제 그만'(1978)에서 아이를 업고 연기하고 있는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역배우 시절의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역배우 시절의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KBS 청소년드라마 '고교생일기' 출연 당시 강수연(오른쪽)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KBS 청소년드라마 '고교생일기' 출연 당시 강수연(오른쪽)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교 졸업 때까지 놀지 못했던 소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일요일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있었는데 그 날도 방송국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생긴 거였다”고 술회할 만큼 강수연의 배우 경력엔 쉴 틈이 없었다. ‘고교생 일기’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 강수연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사실상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떠맡은 한 편으론 배우 활동을 계속 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내가 의사표현을 하기도 전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연기를 한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아저씨들이 와서 “너 이렇게 해봐, 웃어봐” 그래서 그대로 하면 과자도 주었다. 그 당시는 연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해진 역할에 따라 시키는 대로 연기하고 명랑한 이미지로만 소비되던 아역의 시기를 통과해, 연기의 진정성을 고민하는 배우로서의 사춘기를 맞은 것이다.

속칭 얄개(야살스러운 짓을 하는 아이)로 불리던 하이틴 배우들이 연기자로서의 성장에 실패하고 은퇴 수순을 밟기 십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시작한 연기지만 정말 잘 시작한 것이라는 인식”과 “연기자는 미치도록 매력이 있는 직업이며 평생에 승부를 걸 직업으로 후회 없이 죽도록 열심히 하자는 결심”을 세운 강수연은 김수형 감독의 ‘W의 비극’(1985)에서의 연극배우 지망생 혜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2’(1986)의 소매치기 영희 역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성인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배 감독은 ‘고래사냥 2’에서의 강수연을 두고 “아직 어린 배우지만 ‘깡다구’가 있고 무척 열성적이다. 본인이 선택한 작품을 위해서 다른 계획을 모두 보류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기에 전념하는 진지한 자세를 높이 사줄 만하다”고 평했다. 연기를 위해서라면 온 집념을 불사르는 악바리 근성은 나중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촬영할 때도 발휘되어 비구니 역을 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고 촬영 기간 내내 로케이션 장소인 전남 순천 선암사 근처에서 숙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 '씨받이'에서 열연한 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아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씨받이'에서 열연한 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아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강수연이 박중훈(오른쪽)과 호흡을 맞춘 청춘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강수연은 성인이 되자마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며 충무로 톱배우의 자리를 차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강수연이 박중훈(오른쪽)과 호흡을 맞춘 청춘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강수연은 성인이 되자마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며 충무로 톱배우의 자리를 차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충무로 스타에서 베니스 여왕으로 

1987년엔 강수연의 출연작만 6편이 개봉했다. 멜로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에서는 과거 청춘스타의 발랄한 이미지를 이어가며 서울관객 26만명이라는 흥행을 이끌어냈고, 이혁수 감독의 ‘연산군’에서는 장녹수 역으로 팜 파탈의 역할에 도전했으며, 김동인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한 변장호 감독의 ‘감자’에서 억척스러운 아낙네 복녀를, 유지형 감독의 사극 ‘됴화’에서는 도화나무가 내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 도화를 연기했다. 송영수 감독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에서는 고단한 인생역정을 살아가는 창녀 순나 역을 맡아 제26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꿰찼다. 22세의 청춘이었지만 강수연은 이미 장르와 배역을 가리지 않는 중견배우의 원숙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임권택 감독은 ‘씨받이’에 강수연을 캐스팅한 이유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우 강수연의 진가를 꿰뚫어본 거장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18세 철없는 애부터 씨받이로 가서 한 1년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거를 거기서 1년 후든 2년 후든 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고 났을 때 연기가 저 앞하고 뒤가 전부 커버될 만한 충분한 기량을 가진 배우는 강수연뿐이었다.” (책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씨받이’의 옥녀는 처음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소녀로 등장한다. 하지만 자신이 배앓이 해 낳은 아이에 대한 모성애를 갖게 되고, 씨를 뿌릴 뿐인 대갓집 종손 상규에게 진심으로 연정을 품으면서 세속적 욕망과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에 눈뜨게 된다. 그러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의 강수연은 반대로 짊어진 업을 내려놓고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에 초탈한 듯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필모그래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두 영화는 극과 극을 오가는 연기 스펙트럼을 한 몸에 소화해내는 강수연의 연기 내공에 대한 증거들이다.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의 강수연. 배역 소화를 위해 삭발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의 강수연. 배역 소화를 위해 삭발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강수연이 '아제 아제 바라 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여배우상을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임권택(왼쪽 두 번째) 감독과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맨 왼쪽은 제작자인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맨 오른쪽은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다.
배우 강수연이 '아제 아제 바라 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여배우상을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임권택(왼쪽 두 번째) 감독과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맨 왼쪽은 제작자인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맨 오른쪽은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다.

 ◇모스크바까지 사로잡은 연기 

‘씨받이’의 베니스영화제 수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한국의 여배우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리라고는 그 당시엔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강수연 본인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나라 영화의 해외 업무를 관장했던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로부터 영화제에 참석하겠느냐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아마 그때 영화진흥공사 직원분이 대리수상했을 것이다. 나는 전화로 연락받고 놀라서 ‘왜 나를 주지?’ 그랬다.” 결국 강수연은 베니스에 가지 못한 채 국내에서 열린 자축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년 후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수상할 때는 양상이 달랐다. “그때는 베니스 때를 교훈 삼아 미리 준비를 했어요. 국내 언론도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마치 내가 이미 수상한 것처럼 들뜬 분위기였죠.” 그런데 시상식 전날이 되도록 영화제 측에서는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대를 접은 강수연은 호텔방에서 일행들과 같이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이제 우린 창피해서 빈 손으로 어떻게 귀국하냐? 배 타고 일본 거쳐서 몰래 들어가자”는 식의 신세한탄조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이 들었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다. 최우수여자배우상 수상이 확정되었고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그날 아침에야 온 것이다. 전날 체념하며 마신 술 탓에 “얼굴도 심하게 부어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준비한 한복을 겨우 입고 머리는 파마 상태 그대로 나갔어요. 도저히 머리를 만질 시간은 없었거든요.” 파마머리에 한복 차림으로 시상식 무대에 오르게 된 건 이런 해프닝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 뒤로도 강수연은 박광수 감독의 ‘베를린 리포트’(1991),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1991) 등에 출연해 19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를 견인했고, 연예계 최초로 억대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되어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1992)로 받은 출연료는 2억원에 달했다.

훗날의 여담이다. ‘베테랑’(2015)의 대사로 유행어가 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류승완 감독이 무명시절 술자리에서 강수연으로부터 들은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기억해두었다가 쓴 대사였다고 한다. 아역 데뷔 이래 ‘달빛 길어올리기’(2010)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영화와 한 몸으로 살아온 진정성이 묻어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한 현역, 배우 강수연의 이야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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