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닥치고 계산이나 해(Shut up, and Calculate!)”
반도체를 비롯해 오늘날 첨단 문명의 바탕 이론인 양자역학. 20세기 이후 이루어진 과학의 중요한 성취 가운데 이 이론에 힘입지 않은 게 거의 없다 하나 정작 이해했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다. 물리학 교육 현장에서 이 한마디는 양자역학은 이해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라는 분위기를 드러내는 자조적인 말이다.
장회익(81)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얘기다. 장 교수는 달과 손가락의 일화를 들어 물리학도 시절 그 절망감을 소개하고 있다.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은 일차적인 좌절을 겪게 마련이고, 본인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굳이 달을 보겠다고 고집하는 이에게 양자역학은 절망이라는 것이다. 앎을 추구하는 이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이 책은 좁게는 물리 이론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넓게는 생명과 우주, 정신과 물질, 앎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철학을 씨줄로, 물리학을 날줄로 해서 말이다. 예컨대 뉴턴의 고전역학, 즉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밝힌 중력 이론은 사과가 지구로 떨어지는 원리뿐만 아니라 태양계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수성의 세차운동처럼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생긴다. 200년도 더 지나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로써 뉴턴의 중력 법칙은 특정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근사이론으로 밀리고,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우주의 운행 원리를 밝힌 일반상대성이론이 보편 이론으로 고전역학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원자보다 작은 세계, 즉 양자 세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상대성 이론마저도 완전하지 않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이 나오고, 통계역학이 생겨나지만 이마저도 온전한 ‘달’을 보는 것은 아니다.
원로 물리학자는 이러한 앎의 발전 과정을 중국 송나라 곽암선사의 심우십도,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바탕에 깔고 10개의 장으로 풀어내고 있다. 심우(尋牛)는 소를 찾아 나선다는 뜻으로, 소는 진리를 의미한다. 과학의 발전 과정을 10가지 고개로 전개하는 셈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읽기에 만만하지 않다. 원로 물리학자는 ‘친절’하게도 암호문 같은 물리 방정식까지 꼼꼼히 적어놓았다. 일반인이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도 이해하기 어렵다. 난해한 물리 이론이 엄정한 수학적 논리를 통해 정립된 것이란 점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자연과학, 특히 물리 이론의 발전 과정, 생명, 몸과 마음, 궁극적으로 앎을 이해하는 과정, 지적 도약의 극적인 장면들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펼칠 의미는 있다.
노학자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양자역학의 이해는 생애 중요한 부분이 됐으며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적지 않다고 했다. 양자역학의 이해는 오늘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코펜하겐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회익 교수는 서울 해석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양자역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지성이다.
정진황 뉴스1부문장 jhchung@hankookilbo.com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장회익 지음
청림출판 발행ㆍ612쪽ㆍ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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