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종교 너머 새 가치 찾는 체코ㆍ오스트리아 수도원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사립 중ㆍ고등학교(김나지움)는 수도 빈에서 북동쪽으로 80㎞가량 떨어진 멜크 왕립 수도원 내에 있다. 수도원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2000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하우 계곡 일대에 위치해 있다. 1089년 바벤베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2세가 자신의 성(城)을 베네딕토 수도회에 기증해 설립됐다. 김나지움은 1140년 만들어질 당시에는 신학자 양성을 위한 폐쇄적인 수도원 부속 학교에 불과했다. 이후 고대어 등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였다가 1977년부터 다양한 특별교육이 이뤄지는 고등실업학교로 확대됐다. 수도원에서 운영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입학이 가능하다. 학비는 월 85유로(11만원)로 비교적 저렴하다.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다. 오랜 전통과 뛰어난 커리큘럼 덕에 오스트리아 최고 명문 사립학교로 꼽히며 입학 경쟁도 치열하다. 38개반 약 9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노란색 외벽과 화려한 장식이 900년 역사의 위용을 뿜어내는 수도원을 찾았다. 관광객 사이로 수업을 위해 이동 중인 재학생이 드문드문 보였다. 수업 공간 및 기숙사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이날 수도원 안내를 맡은 마르틴 로테네더 수사신부는 “현재 수도원의 가장 큰 역할은 수업과 교육”이라며 “학생들의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인성 계발에 있어 중요한 목회자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운영과 더불어 도서관은 학문 중심지로서의 수도원을 잘 보여준다. 베네딕토 수도회는 ‘기도하며 일하며 읽어라’는 모토를 내걸고 사제들의 독서와 연구를 중시했다. 수도원은 고대와 중세 필사본(1,888개), 서기 1500년 이전에 제작된 고판본(750개)과 16~18세기 판본(2만6,200개) 등을 비롯해 10만여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 중 1만6,000권만이 높이 5m에 달하는 아름다운 서고에 전시돼 있다. 이 서고는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1980년에 쓴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도원은 왕가의 유물과 장서 등을 외부에 공개하고 기도 수련회, 종교행사, 예술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을 꾀한다. 로테네더 신부는 “수도원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신의 속성인 아름답고 조화로움을 직접 체험했으면 한다”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 가진 내적 갈구는 신의 속성을 체험하는 것으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멜크 수도원이 교육적 역할을 강조한다면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운영하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왕립 수도원은 가톨릭 관련 예술품 수집 및 소장에 적극 나선 곳이다. 빈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외곽에 있는 수도원은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레오폴트 3세가 1114년 설립했다. 수도원 내부에는 과거 왕실의 별장으로 사용됐던 공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왕가가 사용했던 호화스러운 가구와 식기, 화려한 그림과 카펫 등도 전시돼 있다. 금세공 제단으로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베르둔 제단을 비롯해 성배, 성물, 세례대, 강론대 등 값진 성물들도 수두룩하다. 수도원이 보유 중인 가톨릭 예술품은 현대 작품까지 포함해 4만여점. 볼프강 후버 수도원 박물관 큐레이터는 “가톨릭 성물과 성화, 직물, 가구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품을 통해 신과의 접점을 넓히고 대중에 감흥을 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지가 잘려 몸통만 남은 아이와 부르카(무슬림 여성들의 전통 복장)를 두른 여성이 그려진 그림을 예로 들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종교가 가져온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요.”
체코 프라하 승리의 성모 성당은 지난해에만 45만명이 방문할 정도의 관광 명소다. 이곳에 있는 ‘아기 예수상’ 덕분이다. 성당 내 아기 예수 제단에는 황금빛 옷을 입은 키 45㎝의 아기 예수상이 있다. 16세기 스페인에서 제작돼 체코로 건너와 1628년 가르멜수도원에 기증됐다. 파벨 폴라 주임신부(프라하 가르멜수도원장)는 “가톨릭에서 예수님은 여러 형상으로 표현되는데 아기 예수상은 특히 거룩함과 순수함을 의미한다”라며 “신자가 아닌 이들도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성당 박물관에는 한복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아기 예수상에 봉헌하는 옷들이 전시돼 있다.
유럽 내 수도원들이 이처럼 문을 열고 외부와의 소통을 적극 꾀하는 데는 과거와 달리 현대 종교의 역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통계 연감에 따르면 201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원 수는 496개로 10년 전(2007년 587개)에 비해 15%(91개)나 줄었다. 빈 대교구의 프란츠 샤를 보좌주교는 “예전에는 성직자 중심으로 각 교구들이 활동했지만, 최근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진다”며 “종교를 초월해 환경, 정의, 사랑 등의 가치를 함께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멜크ㆍ빈(오스트리아)ㆍ프라하(체코)=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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