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 1891~1961)가 1930년 집권 후 암살되기까지 32년 동안 저지른 학정은, 주요한 것들의 제목만 나열해도 A4 용지 한 장을 채우고 넘칠 것이다. 이웃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암살자를 보낼 정도로 대담했고, 미국 망명자에게 킬러를 보내 살해한 뒤 킬러까지 죽여 꼬리를 자른 적도 있다. 정적 살해를 일삼았고, ‘미라발 자매’의 일 외에도 그는 심지어 측근의 아내나 딸들까지 상습적으로 강간했다. 수도 산토도밍고와 해발 3,098m의 최고봉 ‘피코 두아르테’의 이름을, 어이없게도 국민투표를 통해, 제 이름 ‘트루히요’로 바꾸기도 했다. 쿠데타 시기에 육군 총장이었지만 그 역시 선거로 집권한 적법한 대통령이었다.
1937년 10월 2일 ‘파슬리 학살(parsley Massacre)’이 시작됐다. 도미니카군은 북서부 아이티 국경 마을의 아이티 이민자 1만2,000여명을 단 7일 만에 학살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는 섬 하나를 각각 8분의 5와 8분의 3씩 나눠 국토로 삼고 있다. 도미니카는 스페인 식민지로 긴 세월을 보냈고, 아이티는 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공용어도 다르고, 인구 구성과 피부색 분포도 얼마간 다르다. 인구는 1,000만명 남짓으로 비슷해서 아이티 인구 밀도가 높다. 19세기 초 약 20년간 아이티가 도미니카를 지배한 적도 있었지만, 근년에는 1인 GDP기준으로 도미니카가 아이티보다 4배쯤 잘 산다.
가난한 아이티인들이 빈 땅이 많은 도미니카 국경 오지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도미니카인 중에는 아이티인을 깔보고 차별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비열한 차별 의식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한 게 트루히요의 저 학살이었다. 그는 아이티인들이 도미니카 경제를 좀먹는다고 선언했다. 학살이 워낙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데다 시신을 상어 천지인 바다에 무더기로 유기해버린 터여서 희생자 숫자도 불명확하다. 약 3만5,000명이 숨졌다는 주장도 있다. 루스벨트 미국 정부의 중재로 두 나라는 이듬해 75만달러 배상에 합의했지만 실제로는 52만5,000달러만 지불했고, 그나마도 아이티 공직 부패 때문에 희생자 유족이 받은 돈은 1인당 30달러에 불과했다
파슬리 학살이란 명칭은 군인들이 파슬리 줄기를 들고 다니며 이름을 말해보라고 시켜 그 발음을 듣고 죽일지 말지 결정했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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