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공관·지사 갑질 제보 급증… 상부·본사에 알려도 해결 안돼
한인사회 특성상 재취업도 어려워… 정부 차원 신고·근절 대책 절실
해외 대사관에서 관저요리사로 일하는 A씨는 대사 부부의 각종 요구로 업무 부담이 컸다. 2017년 ‘공관병 갑질 사건’ 발생 이후 정부가 갑질 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 A씨는 공관에서 주최하는 관저 내외 행사의 기획 및 시행과 관련된 제반 업무만 맡았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대사 부부는 전임자와 달리 가족의 점심과 저녁도 준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챙기는데 반나절이 소요됐다. 대사 부인은 오전에 쇠고기를 주며 저녁에 육개장을 만들라거나, 사골국을 만들어 다음날 점심으로 떡국을 해오라고 시켰다.
대사 부부의 휴가 기간에 만두 500개를 빚어 놓으라는 지시도 있었다. A씨는 개인 일정이 겹쳤고 빚을 만두의 양도 많으니 행사가 없는 다음주에 만들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대사 부인은 “왜 만두를 만들지 않았느냐, 지시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A씨는 근무시간에 맞게 업무조정을 하는 것은 요리사의 결정권이라고 항의했지만 대사 부인은 “(업무 결정권은) 내게 있으니 매일 업무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A씨는 담당 서기관에게 ‘대사관 직원이 아닌 대사 부인이 요리사에게 지시를 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는데, “(관저 요리사 운영 지침상) ‘공관장(배우자)의 지휘, 감독을 따른다’고 돼 있어 문제가 없다”는 답을 받았다. A씨는 ‘대사 부인을 직장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느냐’고 재차 물었지만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이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만 받았다. A씨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7월16일) 이후 해외 공관이나 해외 지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피해 사례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고 29일 밝혔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A씨 외에도 해외 지사에서 일하며 직장 괴롭힘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대기업 해외지사에서 일하는 B씨는 지사장의 폭언과 괴롭힘에 시달렸다. 지사장은 업무 중 실수가 있으면 ‘운하로 뛰어내리라’거나 ‘머리도 나쁘면서 어떻게 대학에 들어갔느냐’, ‘정신을 완전 개조해야 한다’ 등의 인격 모독성 폭언을 했다. B씨의 선배는 2년 넘게 매일 같이 이런 폭언에 시달리다 근무 중 쓰려져 건강이 악화돼 결국 퇴사하기도 했다. B씨가 본사 내부에 마련된 부당행위 신고 창구에 여러 차례 지사장의 괴롭힘을 제보했지만, 지사장은 도리어 B씨에게 ‘제보가 해고 사유가 된다’며 자진퇴사를 종용하기도 했다.
해외의 좁은 한인 사회의 특성상 피해자들이 직장을 그만 둘 경우 다른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으므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직장갑질119는 “해외 공관이나 지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할 경우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괴롭힘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해외에서 발생한 직장갑질을 신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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