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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필연적으로 우둔한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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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필연적으로 우둔한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입력
2019.09.27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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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로마에서 발굴된 라오콘 상. 트로이의 신관이었던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로 바다뱀의 공격을 당하며 고통에 몸부림 치는 모습을 그렸다. 라오콘은 트로이 목마를 성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작나무 제공
1506년 로마에서 발굴된 라오콘 상. 트로이의 신관이었던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로 바다뱀의 공격을 당하며 고통에 몸부림 치는 모습을 그렸다. 라오콘은 트로이 목마를 성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작나무 제공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역대로 불행했다.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누리는 영광은 짧았다. 임기가 흐를수록 대통령에 걸었던 기대는 배신감으로, 환호는 한탄으로 돌아왔다. 퇴임 후엔 군사 쿠데타, 가족 비리, 뇌물 수수, 헌법 유린 등 저마다의 죄명을 품고 법정에 섰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자들은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와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스템만 바꾼다고 해서 반복되는 대통령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미국의 저명한 역사저술가 바바라 터크먼(1912-1989)의 진단은 다르다. 터크먼은 최고 통치자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권력자들이 우둔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다수의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탄생한 이들이 처음부터 어리석었을 리 없다. 이들을 바보로 만든 건 권력 그 자체였다.

터크먼의 저서 ‘독선과 아집의 역사’는 권력에 취해 스스로 뿐 아니라 국민, 국가를 파멸로 이끌었던 최고 통치자들의 과오를 정리한 책이다. 1984년 미국에서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March of Folly: From Troy to Vietnam(바보 행진: 트로이에서 베트남까지)’. 제목 그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베트남 전쟁까지 3,000년간 이어진 우매한 권력자들의 바보 행진을 기록했다.

권력자들의 독선과 아집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등장했다. 정치 체제와도 관계 없었고, 민족과 계급에 구애 받지 않았다. “다른 모든 과학은 진보하고 있는데도, 정치만은 옛날 그대로다. 3,4000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다”던 존 애덤스 미국 대통령의 말은 진실이다. 책은 우매한 권력자들의 특징을 3가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추렸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했던 ‘트로이 목마’는 인간의 이성이 마비 돼 다른 목소리를 무시했을 때 얼마나 아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10년 넘게 이어진 고통스러운 전쟁의 끝자락,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사들을 태운 목마를 최후의 무기로 남겨둔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게 바치는 신성한 선물이라 포장했지만, 함정이었다. 적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일단 내부부터 확인하자는 경고의 목소리는 승리가 가까워졌다는 확신에 묻혔다. 목마가 성으로 진입하자 돌이 떨어지는 등 성벽이 무너지는 전조가 나타났지만 ‘목마를 파괴해야 한다’는 실행 가능한 대안에 대해선 돌아보지 않았다.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맹목적 기대와 바람은 파국의 지름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여섯 명의 교황이 저질렀던 아둔함은 권력이 영원할 것이란 착각에서 비롯됐다. 자신들의 권력과 신분의 불가침성이 영원할 것이란 환상에 사로잡힌 그들은 개인적 야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권력을 활용했다. 자신들의 실정을 비판하는 분노를 깨닫지 못하고 개혁을 거부한 채 부패한 기존 제도를 유지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큰 의문은 전쟁을 지속할수록 불리한 데도 미국은 왜 더 빨리 발을 빼지 못했냐는 것이다. 전쟁을 그만둬야 하는 객관적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미국의 최고 통치자들은 기존 결정을 뒤집을 용기가 없었다.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 잡혀 반대 의견은 무시했고, 반발이 커질수록 신념은 더욱 경직됐다. 터크먼은 미국 스스로 만들어낸 도그마의 덫에 빠진 것이라 분석했다. 사사건건 냉전을 과장하다 보니, 오히려 냉전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독선과 아집은 권력의 부산물이다. 모든 권력자들은 나의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고 정당하고 지지 받을 거라는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진다. 오류를 인정하고, 진로를 바꾸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 사고의 정체, 정지 상태는 독선을 자라나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다.

때문에 권력은 늘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생각하라.’ ‘충분히 상황을 통찰하고, 객관적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라.’ ‘권력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저항하라.’ 대한민국 최고 통치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독선과 아집의 역사

바바라 터크먼 지음ㆍ조민, 조석현 옮김

자작나무 발행ㆍ488쪽ㆍ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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