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는 오른쪽으로만 걷는대. 왜. 왼쪽이 없기 때문이라네요. 그렇다면 완벽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결핍일 수도 있겠네요.

“완벽하니까”에는 “완벽해야만 하니까”의 절대성이 개입되어 있는 셈이지요. “네가 없으니까” 뒤의 “왜”를 징검돌을 밟으면, ‘네가 없으니까 천국이 아니니까’로 이어지지요. “네가 없으니까” 앞의 “왜”를 징검돌로 밟으면, “네가 없으니까 완벽해야만 하니까”가 되지요. 완벽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만드는 절박함은 왼쪽을 없애는 방식으로 부재의 자리를 복원하지요. 그러나 오른쪽밖에 없는 천국은 다시 천국이 아니게 되지요. 고통을 인위적으로 멈춘 ’완벽하니까‘의 장소, 한쪽으로만 걸을 수 있는 경직된 곳을 천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완벽을 위한 제거는 천국에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이 시를 읽다보면, 일정한 간격에서 징검돌로 나타나는 ‘왜’라는 외마디를 열쇠 아니, 부메랑으로 품고 다니고 싶어져요. 좁은 문 부근이라 감각될 때, ‘왜’를 꺼내 던지면, 너머와 너머의 ‘왜’를 보여줄 것 같아요. 거기가 돌아온 부메랑이든 사라진 부메랑이든, 유지 아니고 역전의 장소일 것 같아요.

‘왜’를 앞뒤의 인과로 읽어도 잘 맞물리는 시인데요. 자연스럽게 그리 읽고 있기도 한데요. 그리 읽으면서도 그리 안 읽고 싶어져요. ‘왜’는 다만, 오로지, 이후로 던지는 물음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시도 ‘왜’ 이전으로 돌아가는, 소급이 어울리지 않지요. 설령 이 시의 마지막에 ‘왜’를 붙여보면, 천국이니까라는 문장이 써진다 해도, 맨 처음과 같은 천국은 아니지요. ‘왜’는 도돌이표 아니고 우주를 향한 던짐이지요. 이 시의 관점은 ‘선’이 아니라 ‘점’이에요. 이 흩어짐, 이 단호한 절절함이 좋아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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