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2차대전 독일 드레스덴 폭격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945년 2월 영국과 미국 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당한 직후 독일 드레스덴의 모습. 독일 사진작가 리하르트 페터가 촬영했다. ⓒDeutsche Fotothek

2차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인 1945년 2월13일, 독일 드레스덴의 밤하늘이 새까맣게 뒤덮였다. 영국 공군 폭격기편대의 야간 공습이었다.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은 밤 9시51분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폭탄은 밤 10시13분에 투하됐다.

드레스덴이 연합군의 폭격을 받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미국 8공군은 1944년 10월7일, 드레스덴 중심가에 있는 철도 야적장을 두 차례에 걸쳐 70톤의 고폭탄으로 폭격했다. 또 1945년 1월16일에도 같은 목표물을 대상으로 133대의 폭격기가 300톤이 넘는 폭탄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영국 5폭격비행단의 이날 폭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과 달랐다. 폭격의 목표물이 군사상 목적에 사용되는 교통선이나 군사저장소가 아니었다. 그냥 도시 전체였다. 민간인의 전면적인 살상과 도시 전체의 파괴가 목적이었다.

드레스덴은 2차대전 개전 전 독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였다. 드레스덴보다 큰 여섯 도시는 이미 연합군 폭격에 완전히 폐허가 된 후였다. 드레스덴에 공장지구가 없지는 않았다. 항공기부품 공장이나 야포 공장 등이 도심 아닌 교외에 위치했다. 그러나 교외는 이날 폭격되지 않았다. 즉 이날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특정 군사교리에 입각한 계획된 공격이었다. 이름하여 ‘전략폭격’이라는 교리다.

 ◇적진을 무차별 파괴하는 전략폭격 

항공전력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적의 항공전력을 약화시키는 전투임무이고, 다른 하나는 적의 육상이나 해상전력을 공격하는 폭격 혹은 공격 임무다. 어느 쪽이든 공격 대상이 적의 군대나 직접적인 군사시설물이라면 이상할 게 없다.

전략폭격은 이러한 일반적인 폭격과 구별된다. 전락폭격의 공격 목표는 적의 군대가 아니다.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는 적의 경제적 능력 파괴가 1차적 목표다. 경제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를 감안컨대 이는 전쟁 상대국의 모든 영역을 목표로 한다.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군대란 없으므로 모든 논밭을 불태워버리는 일은 전략폭격의 합당한 목표다. 옷을 입지 않는 군인은 없으므로 모든 섬유공장을 폭파하는 일은 전략폭격의 적합한 목표다. 살려뒀다가는 총 들고 싸울 수 있는데다가 아기를 낳을 수도 있으므로 모든 여자를 죽이는 일은 전략폭격의 타당한 목표다.

전략폭격에는 이러한 1차적ㆍ물리적 파괴에 더해 2차적ㆍ정신적 목표도 있다. 바로 적국 민간인들의 싸우려는 의지와 사기를 꺾는 일이다. 전략폭격에 의해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과 친구가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길거리가 화염에 휩싸이면 싸우기보다는 항복하리라는 가정이다. 전략폭격의 이러한 측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용어도 있다. 이름하여 ‘테러폭격’이다. 적국의 시민사회가 극심한 공포를 겪게 만들어 허물어트리려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달리 말해 무장한 상대방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비무장 상태인 상대방의 아내, 부모, 자식을 노리는 치사한 방법이다.

 ◇“폭격기는 언제나 끝장낸다” 

전략폭격의 아이디어는 이탈리아 군인 줄리오 두헤에서 비롯됐다. 1차대전 때 연합국 일원이었던 이탈리아군은 전쟁 내내 부족한 전투력으로 고생했다. 종전 후 출간한 책에서 두헤는 융단폭격과 화학무기에 대한 방어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민간인의 의지를 꺾는 데 주목했다. 두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서 항공장관으로 일했다.

이후 두헤의 주장에 동조하는 군인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영국의 휴 트렌차드와 아서 해리스, 미국의 빌리 미첼과 커티스 르메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모토는 ‘폭격기는 언제나 끝장을 낸다’였다. 두헤의 생각을 실전에 적용한 최초 사례는 1920년대의 영국 공군이었다. 현재의 이란과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영국은 전략폭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폭격기대대장이었던 아서 해리스는 “아랍인과 쿠르드인은 45분 내로 큰 마을 하나가 완전히 쓸려 나가고 주민의 3분의 1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전략폭격에 대한 관심을 보인 나라는 영국과 미국만이 아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 일본은 난징과 충칭에 대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특히 1939년 5월3일부터 이틀 동안 72대의 폭격기가 약 600톤의 폭탄을 70만여 명이 사는 충칭의 주택가에 떨궜다. 독일도 스페인내전 기간 중 파견한 레기온 콘도르를 통해 전략폭격을 실험했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림으로 참상을 고발한 1937년 4월26일의 게르니카 폭격이 한 예였다.

전략폭격의 효과에 대한 의구심은 이미 스페인내전 때부터 생겨났다. 게르니카 건물의 4분의 3을 완전히 무너트린 레기온 콘도르의 폭격은 7,000명 바스크인의 저항의지를 당장은 꺾었을지 몰라도 나머지 스페인 사람들의 적개심은 오히려 키워 놓았다. 또한 폭격기와 전투기 사이의 속도 경쟁에서 전투기가 우세를 점하면서 “폭격기는 언제나 끝장을 낸다”라는 호언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도살자’들의 세 차례 출격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서 해리스가 이끄는 영국 폭격기사령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1파를 구성한 254기의 랭카스터는 총 875톤의 폭탄을 드레스덴 시가지에 투하했다. 특히 500톤의 고폭탄에 더해 375톤의 소이탄, 즉 인화물질이 추가됐다. 고폭탄이 창문, 문, 지붕 등을 날리면 인화물질이 건물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불을 지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건물에 숨은 사람을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시킬 수 있었다.

영국 공군은 민간인 살상률을 더 높이기 위해 1파 공격 후 3시간쯤 지난 뒤 2파 공격에 나섰다. 이제 공습은 끝났다고 생각한 독일인들이 부상자를 나르는 시점을 노린 거였다. 529기의 랭카스터는 2월14일 오전 1시부터 2시 사이에 1,800톤 이상의 폭탄을 더 떨어트렸다. 마무리는 B-17 316기로 구성된 미국 8공군 폭격기편대였다. 이들은 2월14일 점심 때 782톤의 폭탄을 이미 완전 폐허 상태인 드레스덴에 추가 투하했다. 미국 공군도 고폭탄과 인화물질의 비율을 약 6대 4로 맞췄다. ‘테러폭격’이라는 말이 껄끄러웠던 영국 공군은 전략폭격을 두고 ‘지역폭격’이나 ‘사기폭격’, 미국 공군은 ‘정밀폭격’이라 불렀다.

전략폭격은 비단 폭격을 당하는 민간인들에게만 가혹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사는 대도시를 목표로 하다 보니 적국 깊숙이 장거리 비행을 감수해야 했다. 그만큼 적 전투기의 요격과 대공포의 화망에 격추될 가능성이 높았다. 2차대전 중 영국 폭격기사령부 소속 조종사 총원 12만5,000명 중 약 5만5,573명이 전사하고 8,403명이 부상을 입고, 9,383명이 포로로 잡혔다. 44%가 넘는 폭격기 조종사의 사망률은 1차대전 때 보병장교의 사망률보다도 높았다.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에는 추가적인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독일 동쪽에 위치한 드레스덴은 미국이나 영국보다는 소련이 점령할 가능성이 더 컸다. 소련이 점령하기 전에 영국 폭격기사령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드레스덴은 소련이 점령한 후 동독의 일부가 되었다.

 ◇뜻한 바를 이루기는 했나 

폭격 후 드레스덴의 거의 모든 건물은 파괴되고 불탔다. 영국 공군의 평가에 의하면 공장지구의 건물 23%와 상업지구의 건물 56%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주거지구의 집은 약 7만8,000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2만8,000채 정도가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됐으며, 이보다는 약하지만 약 6만5,000채가 피해를 입었다. 집 한 채당 4명의 가족을 가정하면 최소 4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살 집을 잃었다. 인적 피해는 약 64만 명의 시민 중 최소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전쟁 당시 독일 선전기구는 2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숫자였다. 부상자는 너무 많아서 공식 집계조차 시도되지 않았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연합군이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불분명했다. 종전 후 포로가 된 독일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를 심문한 결과에 의하면 드레스덴의 산업 생산은 폭격 후 급속히 회복됐다. 드레스덴을 폭격하지 않아도 독일의 항복과 서부전선의 진격은 어차피 예상이 가능했다. 드레스덴의 참화를 보고 소련이 겁을 집어먹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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