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1>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메이크업은 얼굴 아닌 마음을 만지는 일”
아티스트로 올해 30년 “나눔은 나의 의무”
“이한열 열사가 죽은 날 저도 연세대 안에 있었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정샘물(49ㆍ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정샘물 뷰티, 정샘물 아트 앤 아카데미) 원장의 입에서 ‘1987’이 가장 먼저 나올 줄은 몰랐다. ‘삶도’ 인터뷰 일부를 보완해 묶은 책 ‘언니들이 있다’를 받아 든 그가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 이 열사의 모친 배은심씨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를 본 그가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더니 그날의 얘기를 꺼낸 거다. “열일곱 살 때였는데, 저도 그날 최루탄 가스에 기절해서 집으로 실려갔어요.”
열일곱 살, 만으로 고작 열여섯 살 소녀가 왜 그날 연세대 안에 있었던 건가. “열아홉 살 때까지 3년 간 연세대 공대 대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우편물도 나르고, 손님들 차도 내고, 탁자도 닦고요. 그 돈으로 고등학교 등록금을 냈죠.”
지금은 대한민국 정상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기업가가 됐지만, 어린 시절엔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극과 극의 삶을 경험한 거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가사 도우미에, 운전기사까지 둘 정도로 풍족했지만, 순식간에 쫄딱 망했다. 지금도 그가 잊지 못하는 순간은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고 교실에서 쫓겨난 중학교 때다. “담임 선생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수업 듣지 말고 교무실로 가서 벌서고 있으라더군요. 한 반에 68명일 때인데 그 많은 아이들이 저를 쳐다봤던 기억이 나요.”
그러니 돈을 벌어야 했고 찾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연세대였다. 두 달 간격으로, 한 달은 4만7,000원을 다른 한 달은 7만2,000원을 받으며 일한 덕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고1 때로부터 꼭 30년 뒤인 2016년, 그는 연세대 강단에 섰다. 이태규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의 의뢰로 강의를 시작한 거다. 그 감격을 어찌 남이 헤아릴 수 있을까. 그가 인스타그램에 남긴 것처럼 ‘교수를 꿈꿨던 고딩 알바생의 기적’이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긍정의 빛이 가득하지만, 청소년기에는 그도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모친을 따라 우연히 간 교회의 외국인 선교사가 구워주던 쿠키 향기가 어쩌면 그를 살렸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그 안에 자존감의 싹을 틔우게 했다. 어차피 죽을 용기는 없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를 오려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시작 아닐까. 그는 “다 잃고 나니 자생력이 생기더라”고 했다.
그가 메이크업을 외모가 아닌 마음을 만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신에게 결핍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낳은 두 딸이 주는 행복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정샘물 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가로수길(강남구 압구정로) ‘정샘물 플롭스’에서 만났다.
◇나도 내가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열일곱 살에 연세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요?
“네, 공대 대학원에서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좋은 곳에서 했죠. 열일곱 살 때부터 열아홉 살까지 일했는데 꿈이나 비전이 생기더라고요. 나도 교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은 매년 하반기에 연세대 공대 대학원으로 강의를 가요! 3년 전부터 의뢰가 들어왔죠. 화공생명공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요. 학생들이 화장품 회사 연구원으로도 많이 진출하니까 메이크업 전문가의 강의를 만든 거죠.”
그는 처음 강의하러 간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수업 시작 네 시간 전에 도착해, 30년 전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생 식당도 가고 학교에서 파는 학용품도 샀다.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벌 정도로 집안 형편이 안 좋았나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완전히 망했거든요. 그렇게 되면 친척도, 이웃도 다 등을 돌린다는 걸 알았죠. 당시 외가에 번성한 분들이 많았는데도요. 집에는 수시로 빨간 (압류) 딱지가 붙고 계속 이사를 다녔죠. 모두가 외면할 때 저를 받아준 곳이 교회였어요. 아직도 기억 나요. 교회에 여자 선교사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동안 먹어본 적 없던 바닐라 쿠키 같은 걸 구워주셨죠. 아직도 그 향기가 잊히지 않아요. 이 분도 가족이 있을 텐데 왜 여기에 와서 동양의 낯선 나라 아이들을 섬기고 있을까 생각했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이미지를 모았어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스크랩했죠. 그렇게 만든 노트가 엄청 많아요. 그게 저의 무기가 됐죠. 인생 로드맵이 되기도 했고요. 지금까지 발전시켜서 이어오고 있어요. 예전에는 신문, 잡지 같은 데서 남의 그림, 남의 글을 오려서 스크랩했다면, 지금은 내 글, 내 그림을 얹어서 크리에이티브하게 만들고 있는 거죠.”
-신문 기사도 스크랩을 했군요.
“맞아요. 기사를 보면서 작고 사소한 걸 작고 사소하게 보지 않는 게 (인생의) 비밀이구나, 그런 사람들이 감동을 주는구나 깨달았어요. 저의 삶도 저 개인과 가족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국가로 범위가 확대되고 발전돼왔죠. 결국 인생은 나의 실천으로부터 달라지더라고요. 또 그렇게 실천하고 변화할 때 나는 참 괜찮아지는구나 느꼈죠. 그러면서 단점이 지워지고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겨내기 시작했어요.”
-멘토링도 그래서 가능한 거겠지요.
“맞아요. 저도 어릴 때 내 삶이 참 싫었어요.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죠. 내 정체성이 뭔지도 몰랐고요. 엄마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네가 많은 사람들을 만져줄 수 있는 거잖아’라고. 20대 초반에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니까, 메이크업도 과하게 하고 옷도 정말 야하게 입고 다녔어요. 내가 싫으니 나를 나 같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메이크업과 패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잘 먹지도 않아서 몸무게는 43㎏이 나갈 정도로 바짝 말랐고 그러니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보였죠.”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적당히 살이 올라온 갸름한 얼굴에, 입가에는 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엄마 친구의 돈으로 배운 메이크업
-그럼 어릴 때는 꿈이 뭐였나요?
“엄마가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나와서 집에 화집이 많았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종이에 그린 그림인데, 마치 튀어 나올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신기했어요. 내가 아는 그 붓, 물감으로 그린 건데 말이죠. 그래서 연필로 따라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미대에 가서 보니 그걸 ‘마스터 카피’라고 하더군요. 가장 좋아하는 마스터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스터가 어떤 의도로 이런 컬러를 썼는지, 이렇게 그렸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의 화풍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교수도 꿈이었죠.”
지금의 그는 그 어떤 교수 못지 않다. ‘정샘물 아트 앤 아카데미’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또 대학 강단에도 서니까. 화가의 꿈도, 교수의 꿈도 그러니 이루어진 셈이다.
-화가나 교수의 꿈을 버리게 된 건 집안 형편 때문인가요.
“네, 그런데 여러 일을 해보면서 나에게 맞는 일이 뭔지 알게 됐어요. 직업을 선택할 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모두 중요한데, 제가 천식이 있거든요. 섬유가 많은 공간에 들어가면 숨이 잘 안 쉬어져요. 그러니 패션에 관심이 많았지만 직업으로 할 수는 없죠. 자연스럽게 메이크업과 그림으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메이크업에 언제부터 관심이 생겼나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요. 처음에는 내가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에 재미를 느꼈죠. 그러다가 메이크업 아트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지만 돈이 없으니 배울 수가 없었죠. 고등학교도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졸업했으니까요. 그런데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할 수 있는 비용을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 내주셨어요. 우연히 길에서 엄마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제 사정을 듣고 대주신 거예요. 나중에 제가 그 분 자녀 결혼할 때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다 해드렸죠(미소).”
그러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이 있는 거다.
-본격적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든 거군요.
“중ㆍ고교 동창 중에 배우나 개그맨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어요. 서울예전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그 친구들이 연예인이 되면서 제가 메이크업을 해줬어요. 그런 인맥으로 일이 시작됐죠. 그룹 잼의 윤현숙씨의 메이크업도 했는데, 아직도 제 베프(베스트 프렌드)’예요. 그러다가 소개받은 배우가 이승연씨예요.”
그의 인생이 달라진 계기다. 그러나 거저 주어진 게 아니었다.
◇이승연 “너도 참 대단하다”… 전성기의 시작
-어떻게 계속 이승연씨와 일하게 됐나요.
“이승연씨가 아마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찍을 때예요. 제가 메이크업을 해줬는데,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저도 쉬게 됐죠. 그때 제가 동생들까지 책임 지는 상황이라 한 달이라도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처지라 마음이 조급했어요. 그러다가 TV를 보는데 이승연씨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MC로 나오는 거예요. ‘아니, 메이크업을 어디서 했지? 나 잘렸구나’ 싶었죠. 배우가 부르지 않으면 잘린 거니까요. 그걸 보자마자 부리나케 일어나서 청계천으로 갔어요. 그리고 스크랩북을 만들었어요.”
-어떤 스크랩북인가요?
“이승연이라는 배우를 분석한 거죠. 당신은 이렇게 꾸며야 당신답게 예쁘다라는 거죠. 다른 이들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걸 담았어요. 청계천 주변에 고서적을 싸게 파는 서점들이 많았거든요. 잡지 같은 걸 사서 이승연씨와 크로스 오버 되는 외국 배우들 사진이나 스타일을 오려 붙여서 이승연씨를 위한 스타일북을 만든 거예요. 그걸 들고 MBC로 갔죠.”
-가서 어떻게 했나요?
“이승연씨가 녹화하는 동안 분장실에서 네 시간 정도 기다렸을 거예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두근거렸어요. 이승연씨가 끝나고 와서 저를 보더니 ‘너 웬일이야’ 했죠.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그래서 인사하고 스크랩북을 내밀었죠. ‘이게 뭐니’ 하면서 탁자에 탁 놓더라고요. 그러고는 거울 보면서 머리를 매만지더군요. 그 시간이 정말 수만 시간 같이 흘렀어요. ‘그냥 갈까. 내가 여기 대체 왜 온 거야. 아니야, 그래도 도전해야 해’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갔죠. 그렇게 나와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승연씨가 스크랩북을 다시 들어서 넘겨 보더라고요. 저 한 번 보고, 스크랩북 한 번 보고 하더니 ‘참… 대단하다. 가자’ 하면서 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그날로 제가 이승연씨 전속 아티스트가 됐어요. 제 인생의 날개가 되어줬죠.”
-전속으로요?
“네, 말하자면 제가 이승연씨의 스태프가 된 거예요. 이승연씨가 드라마나 광고를 찍을 때 메이크업과 스타일을 제가 책임진 거죠. 제 전성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어요. 고소영, 김지호, 김희선씨 같은 당대 톱스타들을 연달아 맡게 됐죠. 러브콜 1순위 아티스트가 된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첫 달에 받은 돈이 4만7,000원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아티스트로 톱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첫 달 수입이 470만원이었어요. 그 다음 달엔 700만원대, 그렇게 수입이 뛰었죠.”
-이승연씨가 전속으로 채용했을 때는 다른 아티스트와 다른 점이 있어서일 텐데요.
“저는 토털이었거든요.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까지 다 했어요.”
-이승연씨가 흡족해했군요.
“저는 이를 갈면서 했거든요. 그때 일하면서 다른 스타일리스트들을 지켜보면서 제가 속으로 그랬죠. 그런 신발 신고 기동성이 생기겠냐고. 저는 운동화를 신었어요. 현장에서는 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거든요. 제가 스타일링을 하는 대상이 빛나야 하니 저는 아주 간소하게 하고 다녔죠. 그런 작은 데서부터 제 철학을 담았어요.”
◇뒤늦게 이룬 미술 공부의 꿈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정점에 섰을 때 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나요?
“남편 덕분이죠. 늘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거든요. 숍도 걱정되고, 제가 맡은 배우들도 있었고요. 그 말에 남편이 그러더군요. ‘아이쿠, 당신이 다 하는 것 같지. 착각도 정말. 제자들이 몇 명인데. 그리고 고객들도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을 거야. 유학 가도 아무 문제도 안 생겨.’ 그래서 떠났죠.”
그가 다닌 학교는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예술대학(AAU)이다.
-유학생활은 어땠나요?
“정말 행복했죠. 첫 학기부터 상을 받았어요. 메이크업과 순수미술은 입체냐, 평면이냐의 차이일 뿐이더라고요. 가르치는 대로 다 하니까 교수들이 저더러 천재라고 했죠. 하하.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저 그림으로 장학금도 받았어요. 유학 중에 틈틈이 일을 병행했어요. 그러다 졸업을 6개월 남기고 LG생활건강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이후 그는 LG생활건강과 메이크업제품 브랜드 ‘뮬’을 만들었다). 이미 4년 반을 머물렀으니 남편도 귀국하기를 바랐고요. 그래서 졸업장을 못 받았어요. 아직 휴학상태죠. LG생활건강과 일하면서 브랜딩 공부를 많이 했어요. ‘정샘물 뷰티’도 그래서 만들 수 있었죠.”
그를 만난 ‘정샘물 플롭스’ 2층에는 그의 차콜 드로잉, 파스텔화, 유화 같은 회화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색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가방 들고 방송사나 광고 촬영장을 전전했던 프리랜서에서 뷰티숍의 원장이 된 것도 남편의 제안 덕분이었다. ‘정샘물숍’으로 시작해 ‘정샘물 인스피레이션’으로 확장했다. 이어 후배 아티스트를 키우는 교육기관인 ‘정샘물 아트 앤 아카데미’, 뷰티 브랜드 ‘정샘물’까지 만들었다. 올해로 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 지 30년이 됐다.
◇메이크업은 치유다
-메이크업이란 뭘까요?
“저한테 메이크업은 제가 존재하는 이유죠. 메이크업 아트가 저라는 사람을 만들었어요. 메이크업이 없었으면 제가 제 생각을,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도 없었을 거예요. 관계의 측면에서 의미도 있어요.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거든요. 만약 그림을 그리다 틀리면 캔버스를 바꿔서 다시 그리면 되지만, 메이크업은 그게 아니거든요. 메이크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에요. 틀리면 소통하면서 바꿔나가야 하죠. 그리고 함께 책임을 지고요.”
-그렇군요.
“메이크업을 하는 동안 내 손길로 흐르는 감정을 받는 상대가 다 받아 들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메이크업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해요. 제 손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이 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매만져주시기를,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시기를요. 단지 메이크업을 할 뿐이지만, 마음까지 힐링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메이크업을 해요. 마음까지 아름답게 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저의 모토거든요.”
-치유의 메이크업이네요.
“치유죠. 메이크업은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거니까요. 메이크업은 고객이 전날 잠을 많이 잤는지, 못 잤는지, 심기가 편한지, 불편한지까지 헤아려야 하는 일이에요. 공감만 해줘도 마음이 녹아 내릴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소통과 공감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엄청 중요한 덕목이에요. 기술적으로는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성에 눈, 코, 입의 황금분할점을 찾아서 밸런스를 맞춰 메이크업한다는 것이고요.”
-지금의 정샘물을 만든 실패도 있나요?
“환경 같은 물리적인 상황에서 오는 고난이 있었죠. 그게 잘 극복이 안돼서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었죠. 10대에 그랬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을 하면서도 실수를 하기도 했어요. 이승연씨랑 스위스로 광고 촬영 출장을 가는데, 메이크업 박스를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고 차 트렁크에 두고 내린 거예요. 비행기 안에서 알아차렸어요. 이승연씨한테 싹싹 빌었죠. 하하. 결국 현지에서 메이크업 도구와 제품을 사서 해결했어요. 강연도 처음에는 청중 얼굴만 봐도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다녀와서 뭐가 문제였는지 적어보고, 순서도 바꿔보고, 몇 문장을 지우기도 해보면서 고쳐나갔죠.”
-나누는 일도 해오고 있다고 들었어요.
“브랜드 차원에서는 수익금 일부를 대한사회복지회의 무연고 영아와 미혼모 지원에 쓰고 있어요. 또 미혼모들이 만든 제품을 구매해서 캠페인도 하고요. 연말에는 딸들의 이름으로 기부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나누고 돕는 이유가 궁금해요.
“그것이 의무이고 책임이니까요. 한 곳에 고여 있으면 썩고 냄새가 나겠죠. 비우면 새 것이 들어오기 마련이에요. 누군가 메말랐을 때 제 것이 흘러 들어가 살아내는 힘이 될 수 있잖아요.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예요.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과 축복, 물질이 있어 지금의 제가 됐듯, 저 역시 누군가를 돕는 게 의무이고 책임이죠.”
◇입양은 다름일 뿐
-두 딸을 모두 입양한 걸로 알아요.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아이도 낳고, 입양도 하자고 생각을 했어요. 시부모님들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대한사회복지회에 함께 갔어요. 그때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아이가 바로 첫째 아인이에요.”
그 순간 유치원에 갔다 온 둘째 라엘이가 인터뷰 장소로 왔다. 아인이를 키우며 느낀 충만함이 라엘이 역시 데려오게 했을 거다. 라엘이를 본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엄마로 바뀌었다. “라엘아~” 하며 달려가 번쩍 들어 안았다. 엄마를 잠시 만난 라엘이가 나가고 인터뷰가 다시 이어졌다. 그가 말했다.
“아이들 덕분에 풍성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어요. 아이가 없었다면 몰랐을 사랑과 행복을 느끼고 있죠. 낳긴 낳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나 본인의 선택으로 엄마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엄마가 없어진 아이들을 입양은 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 아이들의 후견인이 되어주면 좋겠어요.”
-올해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 지 30년이 되는 해인데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내년 출간을 목표로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직 구상 단계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제가 아카데미를 차릴 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 두려웠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우연히 TV에서 본 가사가 마음에 남아요.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CCM ‘소원’ 중에서)라는 대목이에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답이었어요. 닿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으로 이끌자, 그리고 누군가 나를 비춰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됐듯 나 또한 누군가의 길을 비춰 함께 가자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예요.”
최근 ‘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중 한 곳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일이 있었다. 입사한 지 2년 9개월됐다는 스태프에게 정샘물 원장에게 배운 게 무엇인지 슬쩍 물었다. 입사 전 그는 ‘정샘물 아트 앤 아카데미’에서 정 원장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프로라는 걸 알게 됐다”며 “기술도 배웠지만, 시야가 넓어진 계기였다”고 말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자세를 알게 됐다는 거다. 정치외교학도를 꿈꾸던 한 여성의 미래가 그렇게 바뀌었다.
지금껏 메이크업을 함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마음을 매만지는 일이라고 느낀 적도 없다. 그런데 메이크업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자 공감이고 거기서 치유의 힘도 발휘된다고 믿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만났다. 하긴 사람의 손으로 다른 사람을 어루만지는데 거기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정신을 그는 가르치며, 나누며, 살고 있다. 그런 ‘함께’의 삶에는 비단 개인의 얼굴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메이크업하는 힘이 있을 거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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