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엇, 인터콘티넨털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적 호텔그룹 힐튼을 이끌었던 배런 힐튼이 9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약속대로 거액의 재산을 기부했다. 전 세계 2,800여개 호텔을 거느린 이 미국의 ‘호텔왕’은 2007년 말 아버지 이름을 딴 자선단체 콘래드 힐튼 재단에 12억달러(1조4,300억원)를 내면서 자신이 숨진 뒤에는 재산의 97%인 23억달러(2조7,400억원)를 추가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모델이자 사업가로 유명한 손녀 패리스 등 유족 27명에게 돌아가는 상속 재산은 비율로 보면 3%에 불과하다.
□ 미국 거부들의 통 큰 재산 환원이 심심찮게 뉴스를 탄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인 빌 게이츠 부부나 투자가 워런 버핏은 지금까지 기부한 돈만 누적으로 각각 3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최근 조지 소로스 등 미국 억만장자 19명이 자신들에게 부유세를 매기라는 공개 서한을 각당의 차기 대선 주자들에게 보낸 것이 화제였다. 이들은 “미국은 우리 재산에 더 많은 세금을 매길 도덕적ㆍ윤리적ㆍ경제적 책임이 있다”며 이를 기후변화 대처나 보건의료 개선, 기회 균등 정책에 쓰라고 주문했다. 미국 여론도 61%가 이런 부유세를 지지한다는 조사도 있다.
□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인 제프리 존스는 미국인 거부들의 기부 동기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종교적 이유다. 배런 힐튼의 아버지 콘래드 힐튼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지역에서 자선 활동을 하는 여성 신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고통받는 사람, 궁핍한 사람, 극빈자를 구하겠다”는 힐튼 재단의 설립 목적에 그 흔적이 뚜렷하고 배런도 이런 정신을 이어받았다. 게이츠나 버핏의 기부는 그와 달리 양극화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하려는 노력과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 상속세와 증여세가 아예 없고 법인세도 한국보다 낮다며 해외 이민을 생각하는 자산가나 기업인들이 있다고 한다. 자유한국당이 최근 내놓은 ‘민부론’ 공약에도 상속세와 증여세의 합리적 개혁으로 자본 유출을 막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통 큰 기부는 고사하고 세제를 통한 소득재분배조차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며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한국의 일부 부자들과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에 콘래드 힐튼이 남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아무리 위대해져도 세상이란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란 걸 알아야 한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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