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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화성 사건의 ‘반쪽 진범’

입력
2019.09.19 18:00
수정
2019.09.19 18:5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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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이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옷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분석 작업을 하는 모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이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옷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분석 작업을 하는 모습.

법의학계에서는 한국의 과학수사 역량을 세계적으로 과시한 계기로 2006년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을 꼽는다. 프랑스인 부부가 살던 빌라 냉동고에서 두 명의 영아가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우리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엄마는 휴가차 프랑스로 떠난 뒤였다. 부부가 자신들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해 난관에 빠지자 유전자(DNA) 분석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집에서 수거한 물건과 엄마가 산부인과 수술 받은 병원을 찾아내 세포조직을 확보해 친자임을 밝혀낸 것. 연일 대서특필했던 프랑스 언론은 한국의 신속한 DNA 분석 결과를 믿지 않다 뒤늦게 인정했다.

□ 유전자 분석 기법이 국내 수사에 도입된 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폭풍이 지나간 1991년이다. 영국 유전학자 알렉 제프리스가 1985년 발견해 효과를 입증했는데 도입이 늦은 것은 당시 ‘시국치안’에 집중했던 우리 경찰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 후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가 화성 사건 첫 번째 피해자와 용의자의 DNA를 기술이 앞선 일본에 보냈으나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 아이러니지만 일천했던 유전자 기술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괌 KAL기 추락사고 등 대형 재난을 겪으면서 발전했다.

□ 화성 연쇄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를 33년 만에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유전자 분석 기법의 비약적 발전 덕분이다. 최근 주류를 이루는 감정법인 PCR법은 시료의 온도를 수십 번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면 수백 배(이론적으로는 수억 배) 크기로 특정 DNA 영역을 복제한다. 100만분의 1㎎의 샘플로도 범인을 식별할 수 있는데 틀릴 확률은 100억분의 1 이하라고 한다. 하지만 DNA 분석이 만능은 아니다. 시료 채취 잘못과 허술한 보관, 감정 절차 오류 등이 재판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억울한 피고인을 과학적으로 구제하는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에선 DNA 검사로 오판을 밝혀 내기도 하지만 거꾸로 잘못 감정해 유죄가 된 사례도 드러나고 있다.

□ 10차례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가운데 3건이 용의자 DNA와 일치했다고 해서 진범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단서인 건 분명하지만 자백이나 정황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쪽 진범’에 그친다. 용의자가 범행을 부인한다니 추가 단서를 찾는 게 관건이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로서 반드시 ‘그놈’을 확인해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 줬으면 한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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