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피아스코에 담긴 키안티. 둥근 피아스코 병을 바로 세우고 보호하기 위해 짚으로 아랫부분을 감쌌다. 과거엔 키안티 와인을 이 병에 담았다. 위키미디어 제공

그는 수집가였다. 그의 집에는 우표, 돈, 수석 등 온갖 수집품이 있었다. 술도 그의 수집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수십 년간 애써 모은 술을 처분해야 했다. 낡은 장식장엔 빛바랜 라벨이 붙은 술이 몇 병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내 눈에 띄는 술이 있었다. 피아스코에 담긴 이탈리아 와인 키안티.

흔한 와인병과는 달리 그 병 모양은 흡사 크게 부풀린 물방울 같다. 몸통 아랫부분이 짚으로 감싸인 와인병, 일명 피아스코는 그 모양 탓에 열대 와인도 있나 하고 착각하게 한다. 과거에는 키안티 와인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원가와 실용성 탓에 피아스코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병목에 ‘검은 수탉’ 엠블럼이 붙어 있는 와인이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 여기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토스카나대공국(1569~1737)이 탄생하기 전, 피렌체와 시에나는 키안티 지역을 놓고 다툼이 잦았다. 1384년의 어느 날, 두 도시국가는 매우 재미있는 방법으로 국경선을 정하기로 합의했다. 방법은 이렇다. 국가를 대표할 기병 한 명과 수탉 한 마리를 각자 준비한다. 새벽에 수탉이 울기 시작하면 기병은 말을 타고 달린다. 두 기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정한다. 단순 명쾌하지 않은가.

키안티 클라시코의 상징 검은 수탉 엠블럼(왼쪽)과 엠블럼 변천사(오른쪽). 1924년 33명의 생산자가 결성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협회는 검은 수탉을 상징으로 삼는다. 2005년, 협회는 그동안 회원들만 전용하던 이 엠블럼을 키안티 클라시코를 생산하는 모든 와인메이커가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협회 홈페이지 캡처

규칙이 그런 이상, 상대 수탉보다 우리 수탉이 먼저 우는 게 관건이었다. 작고 탄탄한 검은 수탉을 준비한 피렌체는 수탉을 굶기기 시작했다. 반면, 크고 울음소리가 우렁찬 하얀 수탉을 준비한 시에나는 수탉을 배불리 먹였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되었다. 어느 수탉이 먼저 울겠는가? 굶주린 피렌체의 수탉은 밤새 배가 고파 잠을 못 이루더니 결국 이른 새벽,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토하고 만다. 피렌체 기병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말에 올라, 국경선을 지나고도 12km를 더 달렸다.

한편, 시에나의 수탉은 배가 부른 나머지 늦잠을 잤다고 한다. 시에나 기병은 수탉의 뒤늦은 울음소리를 듣고는 서둘러 출발했으나, 결국 시에나의 국경을 넘지도 못한 채 한참을 달려온 피렌체 기병을 맞아야 했다.

그 뒤 검은 수탉은 피렌체 군대의 용맹과 지혜, 평화를 상징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고, 1924년 결성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협회는 이후 검은 수탉을 상징으로 삼게 된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엠블럼에는 검은 수탉 아래에 ‘1716’이란 숫자도 보인다. 이 숫자는 이탈리아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메디치 가문과 관련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으킨 메디치가는 키안티 와인을 발전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토스카나대공 코지모 3세 데메디치(Cosimo Ⅲ de Medici)는 1716년 칙령을 발표했다. 피렌체에서 시에나에 이르는 구간인 라다, 가이올레, 카스텔리나 지역에 그레베와 그 북쪽의 언덕을 추가해 키안티 레드와인 특별 산지(키안티 클라시코)로 지정했다. 그림은 발다사레 프란체스키니가 그린 ‘코지모 3세 데메디치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제공

1716년, 메디치가의 코지모 3세는 피렌체 일대의 키안티 와인을 보호하는 칙령을 내린다. 피렌체에서 시에나에 이르는 몇몇 지역을 키안티 레드와인 특별 산지로 지정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날에도 키안티 클라시코를 생산한다. 숫자 1716은 코지모 3세 때부터 이어진 키안티 클라시코의 300년 역사를 의미한다.

이 지정에 근거하여 1932년에 현대적 의미의 키안티 와인산지 구획이 정해지지만, 사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키안티와 키안티 클라시코는 원산지 구분없이 ‘키안티’였다. 1996년에 키안티와 키안티 클라시코가 법적으로 구분되었는데 여기서 ‘클라시코’는 ‘원조’를 의미한다.

키안티 와인은 키안티, 키안티 수페리오레, 키안티 리제르바 순으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은 키안티 클라시코,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셀레치오네 순으로 규제가 엄격하고 등급이 높아진다. 요즘은 키안티의 주품종인 산지오베제 100%도 허용하지만, 이들 와인 대부분은 산지오베제의 블렌딩 비율과 숙성 기간 등에 차등이 있다.

산지오베제는 ‘주피터의 피’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은 빛깔과 풍미를 지녔다. 영롱한 루비색에 체리, 산딸기, 자두 등 검붉은 과일향과 허브향이 느껴진다. 발랄할 정도로 높은 산도와 적당한 타닌이 특징이다.

다양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왼쪽부터 바론 리카솔리의 브롤리오 키안티 클라시코. 안티노리의 페폴리 키안티 클라시코. 프레스코발디의 페라노 키안티 클라시코, 루피노의 두깔레 키안티 클라시코.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사실, 예의 수집가는 나의 시아버지다. 당신의 장식장에서 한때는 품위 있는 루비빛을 뽐냈을 키안티. 가넷빛으로 변하다가 마침내는 호박빛을 띠고 있었다. 당신께서는 하필 왜 이 와인을 남겨놓고 가셨을까.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일기장을 들고는 펼쳐 볼까 말까 고민하듯, 가만히 키안티를 바라보았다. 닭의어리에 깃든 병아리처럼.

시대의창 대표ㆍ와인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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