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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마음풍경] 내 마음의 생존배낭, 심리학

입력
2019.09.11 18: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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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생존배낭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 사람들과의 대화, 심리학에서 얻은 지식들, 문학작품의 문장들, 내가 맡은 모든 꽃향기, 맛있는 음식들의 향취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만능꾸러미가 되어 언젠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와도 끝내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생존배낭을 구성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내 마음의 생존배낭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 사람들과의 대화, 심리학에서 얻은 지식들, 문학작품의 문장들, 내가 맡은 모든 꽃향기, 맛있는 음식들의 향취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만능꾸러미가 되어 언젠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와도 끝내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생존배낭을 구성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심리학을 공부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나의 이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내성적이면서도, 속에 품은 것을 언젠가는 터뜨리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 성격이란 참으로 복잡한 요물이다. 좀 나아질 것 같다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분노의 마그마를 터뜨리고, 심지어 “너 성격 정말 좋아졌다!”고 칭찬을 들은 날에, 참았던 히스테리가 폭발한다. 얼마 전에는 일 때문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업무적인 불편사항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아무리 대화를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에 나도 모르게 버럭 짜증이 나고 말았다. 나의 화에 내가 더 화들짝 놀라 금방 사과하기는 했지만, 다시 볼 수도 없는 사람, 단 한 번 스쳐간 사람에게 미안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어찌나 후회되던지. 내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심리학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을 보살피고 돌보는 데 서툴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내 안의 가장 좋은 에너지는 무엇인지,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내적 자산은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한없는 다정다감함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금방 깨닫고 사과하는 마음도,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드는 밤이 아무리 많아도 끝내 타인에게 다정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따스함이었다. 만일 내가 분노에 사로잡혀 그 다정다감함을 잃는다면, 아무리 현란한 심리학 지식으로 중무장해도, 진정한 치유자(healer)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구스타프 융, 알프레드 아들러, 빅터 프랭클, 카렌 호나이 등 인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그 모든 학자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특히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는 사이가 좋지 않다지만, ‘우리, 진정한 치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갈등이 중요치 않다. 융과 프로이트가 서로 반목했다는 사실보다도 두 사람 모두가 ‘인류의 궁극적인 치유’를 위해 노력했다는 더 커다란 진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심리학과 만난다면, 누구나 나만의 ‘치유를 위한 생존배낭’을 꾸릴 수 있다. 나만의 심리학 생존배낭에는 병원에 가지 않고도, 상담사와 만나지 않고도, 급할 때는 내가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모든 마음 치유 처방전들이 들어 있다. 내 마음의 생존배낭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 사람들과의 대화, 심리학에서 얻은 지식들, 문학작품의 문장들, 내가 맡은 모든 꽃향기, 맛있는 음식들의 향취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만능꾸러미가 되어 언젠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와도 끝내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생존배낭을 구성한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더 감동적인 책을 읽을 때마다, 더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을 감상할 때마다, 심리학 생존배낭은 더욱 산더미처럼 불어난다. 사물은 늘어날 때마다 공간을 차지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생존배낭에는 아무리 많은 치유의 비법을 구겨 넣어도 가방이 찢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셀프테라피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여섯 살 조카와 통화하며 흘린 함박웃음 한 스푼, 영화를 보다가 흘린 눈물 한 움큼,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미친 듯한 설렘 한 국자, 슬플 때마다 펼쳐보는 융의 자서전 첫 챕터. 이 정도 생존배낭이라면 하루는 물론이고 한 달이라도 버틴다.

돌이켜보면 심리학은 나에게 최고의 에너지를 주었다. 항상 ‘깊은 속내를 나눌 만한 또래 친구가 별로 없다’며 ‘나는 친구를 사귀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학하던 나에게, 심리학은 가르쳐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과 친구가 되는 법을. 나는 나를 아끼고 보살피지 못했고, 그 우울한 마음 때문에 타인을 보듬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내 안의 못말리는 다정함과 화해했다. 다정다감함이야말로, 자상함이야말로, 이토록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내가,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사랑을 잃지 않고 평생을 버텨 낸 내 안의 내적 자산이었고, 최고의 회복탄력성이다. 내 모든 글쓰기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순간들, 사랑이 내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랑을 몰랐던 시간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내 다정함의 뜨거운 기록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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