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낮은 출생률을 증명하듯, 내 주위의 아는 부부 중 아이가 둘 이상인 집보다 아이가 없는 집이 훨씬 많다. 각종 통계 지표는 해결될 기미 없이 인구 절벽을 향해 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정부에서는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그간 100조 원 이상의 예산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너무 큰돈이라 그런 건지, 어딘가로 다 새어 나가 그런 건지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 낮은 출생률이 문제라는 사실 자체에 실감이 없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 얼마전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정갑윤 의원은 여성인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출산만 했으면 100점짜리 후보자일 텐데…”
조국 법무부 장관 이슈가 워낙 큰 태풍이어서 함께 날아가 버린 듯하지만, 이번 개각에는 여성가족부 장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과 ‘가족’이 한 묶음인 데에서부터 이 행정 부처가 처한 딜레마가 쉬이 드러나는데, 그럴수록 장관의 가치관과 의지, 정책적 지향점이 중요할 것이다. 신임 이정옥 장관 역시 조국 장관과 마찬가지로 인사청문회 대상이었으나, 경과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했다. 청문회는 지금까지 거개가 그랬듯 신상 털기와 정파 싸움의 시간에 불과했으니, 경과보고서 같은 것 채택되든 아니든 거기에 더 이상 신경 쓸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가 청문회에서 알 수 없었던 이정옥 장관의 지향과 의지는 취임식에서의 그의 아래와 같은 발언으로 다소나마 확인이 가능하다. 의례적인 인사말 이후, 정책과 관련하여 나온 첫 마디다. “돌봄이 존중받고 다양한 가족들이 어울리는 포용사회를 만들겠습니다.” 말이야 당연히 바른 말이다. 돌봄은 아니 돌봄 노동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 사회 돌봄 노동은 여성에게 대부분 전가되어 있으며, 이는 아이 엄마에서부터 아이의 할머니까지 넓게 분포한다. 가족의 개념 이른바 다문화라 부르는 국제결혼 가구뿐만 아니라 이혼 가정, 미혼모(부) 가정, 나아가 성소수자 동반자까지 포함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바른 말을 하는 장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바른 말조차 여성가족부의 딜레마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돌봄 노동의 존중과 다양한 가족 형태의 포용이 무엇을 위함일까. 아마도 저출산 대책의 큰 줄기를 말하는 듯하다.(장관은 청문회에서 저출산 대책에 대한 답변으로 취임사와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저출산 위기는 ‘여성’과 ‘가족’의 울타리를 완전히 넘어섰다. 정부 부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문제를 가족의 문제로 그 안에서도 특히 여성의 숙제로 떠맡겼기 때문에 많은 가족과 여성이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다. 돌봄의 공동체를 여성가족부에서 어떤 정책으로 만들 것인가. 1980년대 여느 골목길처럼 이웃집 주부들이 선의로 서로를 도와주던 시기로 돌아가자는 말씀은 아니길 바란다.
여성가족부 장관은 첫 마디가 보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것이었으면 앞의 말과 마찬가지로 바른 말인 동시에 더 적확한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할 주체는 더 이상 여성일 수 없다. 지금의 30대가 공동체 정신이 없어서, 포용하지 못해서 아이를 안 낳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아 맛볼 수 있는 무형의 충만감보다 아이를 낳아 맞이할 구체적 고통과 손해가 크기 때문에 출산하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혹시 모른다. ‘여성’에 입각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정책을 보다 강하게 추진해 나가면 그로 인해 나비효과처럼 출생률이 오를지도.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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