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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본가 방문 보이콧' 명절 탈출하는 여성ㆍ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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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본가 방문 보이콧' 명절 탈출하는 여성ㆍ청춘들

입력
2019.09.12 04:40
수정
2019.09.12 12:1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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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ㆍ본가 ‘보이콧’ 며느리들 명절 고충 대화 나누며 공감대 

 고향가기 괴로운 취준생들은 함께 모여 넷플릭스 몰아보기 

독립책방 퇴근길책한잔의 '명절 없는 사람들의 포트럭 파티' 공지. 페이스북 캡쳐
독립책방 퇴근길책한잔의 '명절 없는 사람들의 포트럭 파티' 공지. 페이스북 캡쳐

서울역에서 한복차림에 양손에 선물을 들고 기차에 오르는 장면은 우리네 명절을 상징한다. 기차가 닿는 곳에서 누군가는 고향의 정을 느끼며 달콤한 휴식을 하겠지만 또 다른 이에겐 그 자체가 길고도 험한 고통의 여정일 수 있다.

아직은 고향을 찾아 친척을 만나고 가족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런 ‘명절 공식’을 따르지 않으려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다. 해외여행이나 취업 준비를 핑계로 잠적하는 소극적인 ‘명절 도피’를 넘어 주체적으로 명절 연휴를 보내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가부장적 명절 문화에 금이 가고 있다.

 

 ◇딸도 며느리도 "가부장적 명절 거부합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에브리마인드 심리상담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웹툰 작가 이서현씨. 이씨는 올해 추석에도 명절을 거부한 여성들과 브런치 모임을 준비했다. 손성원 기자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에브리마인드 심리상담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웹툰 작가 이서현씨. 이씨는 올해 추석에도 명절을 거부한 여성들과 브런치 모임을 준비했다. 손성원 기자

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필명) 이서현(31)씨는 2016년 결혼 이후 명절 연휴에 한번도 시가에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가에 가지도 않는다. 본가에서도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가사노동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올해 추석인 13일에도 여성 열댓 명이 모여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 예정이다. '며느리 노릇' '딸 노릇'을 거절하는 이들이 브런치 모임에 참석한다. 이씨가 명절에 차례상 차리기를 거부하고 모임을 여는 건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에 이어 세 번째다.

이씨는 사연을 통해 모집인원을 추린다. 기혼 이혼 탈혼 비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나이대도 다양하다. 지난 설 모임 때는 갓 스무 살 여성부터 50대까지 왔다. 사연은 다르지만 각자 '시가나 본가 방문 보이콧'을 외쳤을 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나누고 공감하다보면 2,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씨는 이번 추석 모임 때 ‘내년 설에는 뭘 하지'를 주제로 함께 활동지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내게 주어진 명절이란 시간을 내가 선택해서 보낸다는 의미다. '탈명절'이 더 이상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서울 관악구의 청년 문화공간 '신림동쓰리룸'의 추석 프로그램 공지. 페이스북 캡쳐
서울 관악구의 청년 문화공간 '신림동쓰리룸'의 추석 프로그램 공지. 페이스북 캡쳐

 ◇주체적인 2030 기다리는 ‘탈명절’ 공간들 

지난달 5일 문을 연 ‘관악청년문화공간 신림동쓰리룸’은 추석을 맞아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추석 다음 날인 14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비건 명절음식 만들기’, 웃음명상 행사 등을 연다. 주 참가자는 서울 신림동과 대학동 주변에 사는 대학생과 고시생들이다.

오전에는 공유 부엌을 빌려 비건식(우유 달걀 생선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 동그랑땡, 버섯전골, 송편 등을 만들 예정이다. 곽승희(32) 신림동쓰리룸 총괄매니저는 “혼자인 청년들이 명절을 외롭게 보내지 않을 수 있게 하되, 색다른 체험을 위해 일부러 비건식을 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신림동쓰리룸은 취업난 속 분투하는 청년들이 아무 걱정 없이 넷플릭스를 ‘빈지뷰잉(Binge viewingㆍ몰아서 보기) 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했다.

곽 매니저는 “명절 도피라고 하면 어른들한테 시달리는 걸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연휴를 자기만을 위한 휴식 시간으로 채우거나,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나는 청년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독립책방 '퇴근길책한잔'을 운영하는 김종현(37) 대표는 책방을 연 2015년 3월 이후 명절 연휴에 서점 문을 열어놓는다. 특별히 갈 곳 없는 청년들을 위해서다. 매번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모인다. 20대 중후반과 30대 초반이 대다수다. 올해는 14일에 각자 음식을 가져와 함께 즐기는 포트럭(potluck) 파티를 연다.

김 대표는 “나부터 명절에 꼭 가족을 봐야 한다는 부담에서 내가 벗어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갈 곳이 부족했다”며 “직접 모임을 만들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꾸준히 모였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처음 만난 사이라도 직장 얘기, 결혼관 등 가족과 대화할 때보다 더 솔직한 얘기들이 오가기도 한다"고 전했다.

젊은이들은 이런 탈명절 모임에 호응하고 있다. 가부장적 명절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명절을 보내겠다는 의식의 변화가 엿보인다. 포트럭 파티에 참가 예정인 김성미(33)씨는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내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심아진(28)씨는 “굳이 어색한 친척들과 모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나만의 휴일처럼 편하게 연휴를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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