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한 모든 날이 좋았다. 고마웠다. 수고했다.”
플래카드에는 드라마에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할 때 나올법한 문구가 적혀있고, 일렬로 선 장병들은 정자세로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자신의 목줄을 쥔 사람 옆에 딱 붙어 쉴 새 없이 눈을 마주치고 꼬리를 흔드는 털뭉치들. 지난달 28일 엄숙하지만 인상 깊은 분위기 속에 강원 춘천시 육군 군견훈련소에서 국내 처음으로 공식적인 ‘군견 은퇴식’이 진행됐습니다.
약 100여 명의 군견훈련소 소속 군인들과 후배 군견들까지 참석한 은퇴식의 주인공은 8년 동안 각 부대에서 정찰견으로 활동한 '가도, 단수(셰퍼드), 무궁(마리노이즈)'입니다. 정찰견은 최근 화제가 된 달관이와 같이 실종된 사람을 수색하거나 적군을 찾아내는 일을 수행하는데요. 이날은 셋이 함께 공식 임무를 마치고 전역하는 날이었죠.
“널 데리러 올 때까지 꼭 건강하게만 있어줘.”
은퇴식은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꽃목걸이 및 기념품 증정, 약력소개, 훈련소장 축사, 군견병들의 편지 낭독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여느 군인의 전역식과도 다를 바 없었다고 하는데요. 처음 보는 꽃목걸이가 커서 목이 아닌 몸통에 건 친구도 있었지만 놀라지 않고 신난 표정을 짓는 모습이 귀엽고도 기특했습니다. 가장 마음을 울린 순서는 바로 각 은퇴견들을 담당한 군견병들이 편지를 낭독한 순간이었죠.
특히 단수를 담당한 신재훈 일병은 “네가 더 어릴 때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전역 후 마당 딸린 집으로 이사 가면 바로 데리러 올 테니 그때까지 건강하라”는 당부의 말을 전해 마음을 더 뭉클하게 했습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편지를 낭독해주는 군견병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군견을 보니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세월이 흘러 입과 눈 주변 털이 하얗게 센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죠.
은퇴식이 끝나고 일렬로 선 채 마주한 군인들 사이로 박수를 받으며 마지막 행진을 한 가도·단수·무궁이는 이로써 8년간의 정식 군 생활을 마치게 됐습니다. 이들은 이제 작전견이 아닌 '관리견'으로 훈련소에 마련된 견사에서 돌봄을 받게 되는데요. 과거에 퇴역 군견들은 안락사 되거나 의학실습용으로 기증됐으나, 2015년 개정된 법에 따라 민간 분양 대상이 되어 반려견으로 제2의 견생을 살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아픈 곳은 없는지, 사람을 물거나 다른 동물을 공격하는 성향은 없는지 등의 검사를 거친 후,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열리는 분양행사에 가도·단수·무궁이도 참여합니다. 신 일병처럼 군견을 담당했던 군인이 입양한다는 의사를 밝히면 가장 먼저 입양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네요.
앞서 은퇴식 2주 전인 8월 14일, 군견훈련소에서는 세상을 떠난 군견들의 공로를 기리고 애도하기 위한 '영결식'도 최초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전사자 영결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함께 땀 흘렸던 동료인 군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것이죠.
또 군견훈련소에서는 추모공원 설립도 추진 중입니다. 새롭게 진행하고 있는 이 모든 일에는 지난 3월 28일 군견훈련소에 취임한 수의장교 출신 박창보 훈련소장의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있는데요. 박 소장은 “이번 은퇴식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 온 전우인 군견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 진행했다”며 “군에서 군견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메시지와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군견들에 대한 예우로 진행한 은퇴식. 물론 ‘나라를 위했다’는 말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개들은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것이고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을 위해 맡은 일들을 기꺼이 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일지라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대우해주는 것은 군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를 바꾸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들 삶 전체가 우리 선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최근 군견들의 활약이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군견의 처우에 국민들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공식적으로 영결식과 은퇴식을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군견의 복지를 실질적으로 높이는 변화가 다방면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순하고 똑똑하기까지 한 은퇴견들이 꼭 남은 생은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송아 동그람이 에디터 nerolu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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