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지금보다 30년쯤 늙은 내가 누런 물이 흐르는 물가에 앉아 있었다. 고향마을 내안(川內)을 휘감아 도는 천수천변이었다. 시간이 참 부지런히 질주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데 이 물빛은 왜 제 색깔을 되찾지 못하는 걸까. 30년에 또 30년쯤을 더하면, 상처 입었던 냇물이 스스로 치유하겠지. 나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자연의 힘에 대한 낙관이었다. 누런 물빛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신음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두 번 다시 깨끗한 냇물에 발 담그고 물장구칠 일은 없겠구나.’ 꺼끌꺼끌한 손등을 비비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어금니를 앙다물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깜깜한 밤이었다. 일어나 앉으며 본능적으로 한쪽 손등을 쓰다듬었다. 꿈에서와 달리 내 손등은 매끈했다. 그 순간 꿈결에 안간힘을 쓰며 참았던 눈물이 손등으로 떨어졌다. 밑도 끝도 없는 절망감에 휩싸인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 울었다. 꿈속에서 어금니를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얼얼한 왼쪽 턱을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그 낮에 만난 친구와 주고받은 대화가 이런 꿈을 유도한 듯했다. 추석 때 출장 일정이 잡힌 그는 지난 주말 선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마지막 성묘가 될 거라고. 선산 일대가 산업단지로 편입되는 바람에 묘 이장 문제를 두고 가족들 간에 오간 실랑이를 들려주던 그가 말했다. “그런데 참 묘하더라. 50년 넘게 무심하게 봐온 그 산이 통째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동요가 오는 거야. 한참을 서성이다 왔어. 혹시 비슷한 감정에 빠진 적 있어?” 글쎄. 나는 고향집을 찾을 때면 애써 외면했던 마을 앞 냇물을 생각했다. 벌써 30여년째 누런 물이 흐르는 위험지역.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어린 날, 동네 사람 모두가 몸을 담그고 놀던 냇물. 여름이면 멱 감고 모래무지 잡고 또래들끼리 모여 천렵을 했다. 밤에 친구들과 나란히 누워 별자리를 찾던 모래밭의 사각거림은 얼마나 좋았던가. 초등학생이 되면 수댓바위에 올라가 몸을 날려 다이빙하는 법을 동네 오빠들이 가르쳤다. 그 바위에 올라서서 느끼던 두려움과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거다. 어느 주말에 고향마을로 들어서는데 마을 앞 냇물이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양쪽으로 넓게 펼쳐졌던 모래사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구 채취해낸 모래 대신 흙무더기를 부려놓은 냇가는 진창이었다. 물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모래를 퍼간 후 바닥에 부려놓은 흙이 문제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상류 어디쯤에 젖소 농장과 음식물쓰레기 처리 공장이 들어서서 밤마다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다. 어차피 나는 마을을 빠져나온 뒤였고, 어디를 가나 엇비슷한 풍경이 연출되던 시기였다. 그게 두고두고 내 마음을 들쑤시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꿈의 잔상이 강하게 남았던 걸까,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후 두 살 아래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속내를 털어 놓았다. 한참을 듣던 동생이 입을 열었다. “실은 나도 그 물을 보는 게 많이 힘들어. 무지와 탐욕이 초래한 결과를 통렬하게 증명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지금 우리 세대에게 소중한 걸 제대로 알아보고 지켜낼 분별력이 있는지 의문도 들고.” 꿈이 알려 주었듯이, 고향 냇물이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나는 못 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동생과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지난밤 혼자 감당했던 절망감은 많이 누그러졌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 단속해야 할 것들을 떠올리자 다시 심란해졌다. 이래저래 갈피를 못 잡고 생각만 분주한 밤이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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