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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순이 공순이 차순이… 역사의 숨은 일꾼 ‘삼순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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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순이 공순이 차순이… 역사의 숨은 일꾼 ‘삼순이’를 아시나요

입력
2019.09.05 17:24
수정
2019.09.05 19:2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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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이 국가의 사명이던 유신정권 시절, 여공들은 수출전사로 추앙 받았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 여공들은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해도 여공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제 개발이 국가의 사명이던 유신정권 시절, 여공들은 수출전사로 추앙 받았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 여공들은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해도 여공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땅의 여성들에게 번듯한 이름은 사치였다.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 실망해서 ‘섭섭’, 갓 낳은 아기라서 ‘간난’, 어린 여자라고 ‘언년’이라고 대충 지어진 이름이 태반이었다. 결혼을 하면 ‘OO댁’, ‘OO어멈’으로 불렸다. 1950년대 들어서는 ‘순자’나 ‘갑순’ ‘말순’ 등 이름에 ‘순(順)’자가 들어가는 게 대세였다. 지아비와 집안을 ‘잘 따르는 순한’ 여자로 살아가라는 바람이 투영됐다.

하지만 이들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 지아비와 집안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서 청춘을 다 바쳐 살인적 노동을 견뎠고, 참혹한 인권 유린도 참았다. 억척스러운 삶에 지쳐 울분을 토하려 해도 세상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대로 ‘고분고분 살아라’고만 했다. “팔자려니”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뭘” 하는 체념과 순응 속에 순이들의 삶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삼순이-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은 역사를 스쳐갔던 수많은 순이들의 처절하면서도 숭고했던 삶을 뒤늦게 소환한 책이다. 식모는 ‘식순이’, 버스안내양은 ‘차순이’, 여공은 ‘공순이’로 이들은 뭉뚱그려 ‘삼순이’로 불렸다. 저널리스트인 정찬일씨는 과거 신문기사와 문학작품, 삼순이의 삶을 살았던 9명의 인터뷰까지 엮어 감춰지고 외면당한 또 다른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발굴했다.

그가 유독 삼순이의 삶에 주목한 건 이들의 아픔을 기억해야만 한국 현대사의 역사를 온전히 직시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을 사용하는 데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양해를 구한다.

식모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가 부엌일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넘쳐나면서 갈 곳 없는 10대 여성들은 식모살이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식모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가 부엌일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넘쳐나면서 갈 곳 없는 10대 여성들은 식모살이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식모는 가부장적 의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가히 식모 전성시대였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입 하나 덜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야 했던 어린 여성들이 할 수 있던 일은 ‘남의 집 안’으로 들어가 하녀가 되는 것뿐이었다. 월급은 고사하고 그저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에 감사했다. 어린 식모들의 수요가 넘쳐나다 보니 판자촌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집에서도 식모를 둘 정도였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적 영역에서 식모들의 인권은 보장받기 어려웠다. 구타와 학대, 성폭행 등이 심상치 않게 일어났다. 식모는 사실상 현대판 노예나 다름 없었다.

1960년대 본격 등장해 ‘오라이(All right)’와 ‘스톱(Stop)’을 외쳐온 버스안내양은 ‘을(乙) 중의 을’이었다. 손님과 종업원, 남자와 여자,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에서 그들은 늘 후자였다. 하루에 18시간씩 흔들리는 만원 버스에서 요금 수납과 안내 등 온갖 일을 도맡았지만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심지어 회사는 요금을 가로채는 일명 ‘삥땅’을 했는지를 검사하겠다며 알몸 검색도 했다. 개문발차 사고로 죽거나 다쳤지만 보상은 없었다. 그래도 시골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떠올라 안내양들은 눈물을 삼키며 버텼다.

버스안내양은 거칠고 말썽 많은 남성 차장 대신 ‘상냥하고 부드럽게’ 승객을 모시겠다는 의도로 생긴 직업이다. 그러나 장시간 열악한 노동에 시달린 안내양들은 결코 상냥하고 부드러울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버스안내양은 거칠고 말썽 많은 남성 차장 대신 ‘상냥하고 부드럽게’ 승객을 모시겠다는 의도로 생긴 직업이다. 그러나 장시간 열악한 노동에 시달린 안내양들은 결코 상냥하고 부드러울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공은 국가에 농락당한 ‘빛 좋은 개살구’였다. 경제 발전이 긴요했던 박정희 유신정권은 수출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며 산업현장 최전선에 있던 여공들을 ‘산업역군’, ‘수출전사’라 추켜 세웠다. 하지만 여공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닭장 같은 벌집촌에서 여공들은 노조를 만들어 임금 인상과 후생복지 향상을 요구했다. 독재 정권 타도도 외쳤다. 1970년대 노동운동의 불씨를 틔운 건 여공들이었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은 유신정권 종식에 단초가 됐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주축은 중공업 노동조합으로 넘어갔고, 노동운동은 남성들의 전유물이 돼버렸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과거의 여공들은 ‘비정규직 아줌마 노동자’로 추락했다.

우리 사회에서 밀려나고 짓눌렸던 삼순이들, 그러나 그들은 강했다. 갖은 고난에 굴하지 않고 암울한 역사에 저항한 주인공들이었다. “삼순이들의 삶에는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이 흐르고 있었다. 헤게모니 쟁탈을 좇는 욕망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처절함이었고, 타인을 위해 조각조각 부서지는 희생을 기꺼이 무릅쓴 숭고함이었다.” 책은 이 땅의 모든 삼순이들을 위한 헌사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삼순이-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정찬일 지음 

 책과 함께 발행ㆍ524쪽ㆍ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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