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2014년 3월 러시아 군인들이 우크라이나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 인근 페레발노예 기지를 에워싸고 우크라이나군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다. 앞서 그해 2월 친러 성향의 크림 의회가 크림공화국과 러시아의 합병을 선언하면서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발판이 마련됐다. AP 연합뉴스

2014년 8월22일 러시아군 포병과 보병이 우크라이나 서부의 돈바스로 진입했다. 돈바스는 북쪽의 루간스크와 남쪽의 도네츠크로 구성된 지역이다. 러시아 정부도 자국 정규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 발발이라고 할 만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외침을 겪었다. 13세기에는 몽골, 14세기부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로부터 각각 지배 받았다. 폴란드 귀족들은 우크라이나인을 농노로 부렸다. 외세에 쉽게 굴하지 않는 우크라이나인들은 17세기에 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때까지 우크라이나인들의 구적은 폴란드인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구원의 시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러시아는 동우크라이나, 즉 드네프르강 동쪽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로부터 뺏어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려는 시도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우크라이나를 아예 러시아화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동우크라이나는 1917년 러시아 황제가 쫓겨나자 독립국을 선포했지만 이내 혁명 러시아에 의해 진압됐다. 1918년 서우크라이나가 시도한 별개의 독립도 폴란드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이른바 ‘코사크 기병’의 공급처 정도로 간주했다.

2차대전 중 우크라이나인들의 행동은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인,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증오했다. 나치를 해방자로 여긴 이들은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에 맞선 독일군의 방어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물론 자신들의 집과 마을을 먼저 불태운 독일군을 침입자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2차대전 내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독일과 소련은 격전을 벌였다.

2차대전 후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차지였던 드네프르강 서쪽까지 확보하며 러시아 다음가는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어쨌든 전쟁 때 러시아와 함께 피를 흘린 덕분이었다. 1954년 소련은 19세기 이래로 직접 지배하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겼다. 소련 흑해함대의 모항 세바스토폴이 있는 크림반도는 러시아보다는 우크라이나에 가까운 위치였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1964년부터 1982년 숨질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냉전 체제 하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 간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우선시했다. 설혹 커다란 차이를 느꼈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1968년 8월에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겪은 일을 겪지 말란 법이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는 공산주의 블록 내에서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바르샤바 조약군의 전면적 침공을 받고는 축출됐다. 소련군은 1989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 점령군으로서 주둔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공산주의 블록의 급속한 해체가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1991년 12월1일 우크라이나 전체 유권자의 약 84%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92%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달 26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15개 국가로 분리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마침내 얻은 독립을 기뻐했다.

◇얼떨결에 갖게 된 막대한 핵무기

우크라이나의 독립에는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핵무기의 처리였다. 소련 43로켓군은 원래 우크라이나가 주둔지였다. 5개 로켓사단으로 구성된 43로켓군은 다양한 대륙간탄도미사일과 Tu-95와 같은 전략폭격기를 보유했다. 소련 해체와 더불어 이들은 자동으로 우크라이나군 소속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소련 핵탄두의 약 3분의 1이 우크라이나군 소유로 바뀐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핵능력은 미국과 러시아에만 뒤질 뿐 중국, 영국, 프랑스보다도 앞섰다.

미국과 러시아는 계산은 달랐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했다. 별개의 핵강국 출현이 전혀 달갑지 않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1949년 핵실험 때문에 한국전쟁 때 원자탄을 사용하지 못했다. 소련도 1964년 중국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한 후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을 했다. 사실 우크라이나가 이미 수중에 있는 핵무기를 그대로 갖겠다고 해도 미국과 소련에게 뾰족한 방법이 있지는 않았다. 그냥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심경은 그보다 복잡했다. 코사크 기병의 후예들은 세계를 지배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1986년에 폭발한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체르노빌은 바로 우크라이나의 일부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방사능 등 핵폭발의 폐해를 직접 경험했다.

또한 핵무기를 갖고 있다면 언젠가 핵전쟁에 휘말리지 말란 법이 없다고 염려했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소련이 43로켓군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한 이유도 비슷했다.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만 뒀다가는 미국과의 핵전쟁 시 러시아만 멸망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배치한 핵무기는 미국의 선제 핵공격 목표를 분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와 미국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내보이며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를 종용했다. 특히 미국은 러시아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 핵우산을 제공해주겠다고 공언했다.

핵무기 포기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대적하기에 러시아는 덩치 큰 버거운 상대였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앞으로 러시아가 제국주의적 성향을 자제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핵무기 없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막상 미국이 핵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우크라이나를 지키려 들겠느냐는 지적도 뒤따랐다.

[저작권 한국일보]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주요 사건 그래픽=김문중 기자
◇러시아 개입 막기엔 너무 얇은 핵우산

고민 끝에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12월 우크라이나 러시아 영국 미국의 4개국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각서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안전을 보장하고,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핵무기를 포함해 어떠한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영세중립국으로 남겠다고 대내외적으로 선언했다.

각서와 선언의 효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서구에 가까워지려고 애쓸수록 러시아는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러시아 흑해함대는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세바스토폴을 모항으로 사용했다. 우크라이나가 세바스토폴 사용계약 연장을 허용하지 않을 뜻을 내비치자 2014년 2월 세바스토폴의 러시아군이 경계를 서는 가운데 크림의회는 크림과 러시아의 합병을 선언했다.

같은 해 3월 돈바스의 친러 세력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러시아 사이에 교감이 없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웠다. 4월부터는 친러 민병대와 우크라이나군 간 무장 충돌이 시작됐다. 민병대의 상당수는 러시아에서 온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4,000만 명 넘는 인구에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가진 우크라이나 정규군이 5,000명 수준의 친러 민병대를 제압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3월 말부터 국경지대에는 4만 명가량의 러시아군이 배치돼 있었다. 7월에는 민병대가 러시아제 지대공미사일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를 격추해 탑승자 298명 전원이 사망했다. 민병대가 밀린다 싶자 급기야 8월에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었다. 민병대는 러시아군이 휴가 기간에 해변에서 휴식하는 대신 자신들과 함께 싸우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2018년 11월에는 흑해와 아조프해를 연결하는 케르치해협에서 우크라이나 해군 함정 3척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나포됐다. 2척의 초계정과 1척의 예인선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함대는 흑해의 오데사항에서 아조프해의 마리우폴항으로 항행 중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003년 케르치해협과 아조프해를 공동 영해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우크라이나는 이에 의거하여 러시아가 항행의 자유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크림과 돈바스의 대부분은 러시아군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우크라이나가 기대했던 핵우산은 생각보다 얇았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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