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15>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글은 침묵과 말 사이에서 투쟁한 기록이다. 산문은 말에 더 기대고, 시는 침묵에 더 의지해 태어난다. 좋은 글은 늘 침묵을 머금고 있다. 침묵이 없는 글은 따발총처럼 허공에 난사되어 사라질 뿐이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의 덜미를 잡은 채, 흐른다. 읽는 사람이 멈추어, 생각하게 한다. 행간에 도사린 ‘침묵’을 독자가 누리려 하기 때문이다. 한편 좋은 대화는 침묵이 대화를 주도해도 불편하지 않은 대화다. 달변은 침묵을 곁에 둔 달변이어야 좋고, 눌변 역시 침묵이 주인공인 눌변이어야 좋다. 음악은 어떨까.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는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썼다. “오늘 저녁에도 많은 음과 침묵이 있을 것이다.”(‘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침묵은 단순히 ‘무음’이 아니며, 다른 종류의 언어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17쪽)

막스 피카르트(1888~1965)는 단순히 침묵의 신봉자가 아니다. 침묵을 위해 말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말과 침묵이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말은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리면 위축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 은폐되어 있는 침묵의 세계는 다시 분명하게 드러내어져야 한다. 침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위해서” (15쪽)

오늘날 침묵은 어디에 있는가. 도시에서 침묵은 실종 상태다. 인간은 자연과 달리 끊임없이 소리를 계획하고 생산한다. 음악을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전화를 해 다른 이의 목소리를 찾는다. 침묵은 소리의 끊김이 아니라, 소리를 끌어안고 잠시 기다리는 상태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다. 침묵은 가능성이고, 침착하게 오는 중인 미래다. 침묵이 없는 삶은 가난한 삶이다. 피카르트는 이 책에서 아기, 노인, 시인, 농부, 동물 등의 언어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침묵에 주목한다.

“아기의 말에는 내용보다 선율이 더 많다. (중략) 아기의 언어는 소리로 변한 침묵이다. 어른의 언어는 침묵을 추구하는 소리이다.”(118쪽)

“노인들은 말을 마치 무거운 작은 공처럼 입술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것은 말들을 비밀스럽게 침묵으로 돌려보내는 것 같다.”(119쪽)

“시인들의 언어 속에서만은 이따금씩 침묵과 연결되어 있는 진정한 말이 나타난다. 그것은 망령과도 같다. 자신이 다만 하나의 망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자신은 다시금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비애로 가득 찬 망령인 것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말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리는 어두운 구름이다.” (41쪽)

피카르트는 뮌헨에서 의사로 살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시에 가깝다. 침묵이 언어를 지휘하도록 허락하고, 시적 몽상이 활개 치는 글이다. 마치 침묵의 허락 하에 언어가 겨우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듯 쓰인 것 같다. 단번에 읽어 치우려는 사람에겐 진입장벽이 높은 책일 테지만, 시를 읽듯 천천히 음미하는 자에겐 ‘황홀한 독서 경험’을 줄 것이다. 확신한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지내본 적이 언제인가. ‘틈’이나 ‘망설임’ ‘여백’에 관대하지 않은 이들의 대화 속에서, 침묵은 얼마나 야위었을까. 만약 꾸준히 독서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현명하다면, 그 이유는 ‘침묵 속 경청’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는 남의 말을 듣는 행위고, 듣기는 ‘침묵’을 의자로 사용해 앉아있는 일이다. 타인의 생각 속에서 기다리고, 머무는 일이다. 혼자 책 읽는 사람을 보라! 그는 ‘침묵’에 둘러싸여, 얼마나 아름다운가!

박연준 시인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ㆍ최승자 옮김
까치 발행ㆍ278쪽ㆍ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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