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개도국으로 분류되면 공산품과 농산물 관세 적용 때 선진국보다 유리한 조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경제 발전도가 높은 국가들이 WTO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이 문제를 손봐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4일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 관계부처들은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여부를 두고 수 차례 논의를 진행한 결과 포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우리나라는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당시 선진국으로 분류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농업 분야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농업 이외 분야에서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개도국으로 남았다.
정부 관계자는 “개도국 지위 포기에 부정적이던 농림축산식품부가 최근 양보 의사를 보이면서 개도국 지위 포기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관계부처 간 논의가 좀더 필요하지만, 다음 달까지 의사결정이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 △세계 상품무역에서의 비중이 0.5% 이상인 국가 등 4가지 기준을 제시하며 이에 해당하는 국가는 개도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그는 다음달 26일까지 WTO에 개도국 지위 개선을 요구했고, 실질적 변화가 없다면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4가지 기준 모두에 해당된다.
통상당국에 따르면 미국의 이번 조치는 중국과 인도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수산물 보조금 금지와 전자상거래 협상과 관련해 중국, 인도 등이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려 하면서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제시한 기준에 해당하는 국가는 30여개국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대만, 브라질, 아랍에미리트(UAE), 싱가포르 등 4개국은 미국의 주장에 동조해 개도국 지위 포기의 뜻을 밝혔다. 대만은 지난해 9월 WTO 무역정책검토 회의 때, 브라질은 지난 3월 미국ㆍ브라질 정상회담 때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각각 밝혔다. UAE는 7월 29일 개도국 특혜는 자국에 불필요하다고 밝혔고, 싱가포르는 지난달 1일 자국은 이미 개도국 특혜를 누리고 있지 않으며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WTO 개도국 중 트럼프 대통령의 기준에 모두 해당되는 유일한 국가이면서 현재 WTO 개도국 지위를 통해 얻는 실익도 크지 않은 상황”이라며 “만약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경우 중국, 인도를 향하던 칼날이 우리에게 향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아직 농림축산식품부 등 정부 내 협의가 진행중이며,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지만, 다음달쯤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이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도 지난달 29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국이 국제통상의 농업 부문에서 지금처럼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류종은 기자 rje3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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