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디자이너에게 듣는 가발ㆍ메이크업 이야기
[저작권 한국일보] 뮤지컬 ‘헤드윅’ 분장을 총괄하는 채송화 디자이너가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분장실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가발 앞에 서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난 알아 네 영혼 끝없이 서린 그 슬픔. 그것은 바로 나의 슬픔. 그건 고통 심장이 저려오는 애절한 고통, 그건 사랑!”

여성이 되고 싶었지만 잘못된 수술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셀(주인공 헤드윅의 극중 본명)이 뮤지컬 ‘헤드윅’에서 부르는 메인 넘버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 많은 사람에 상처 받았음에도 또다시 사랑을 꿈꾸는 자의 마음을 표현한 이 노래엔 절절한 슬픔이 배어있다. 한셀의 운명이 더욱 기구하게 읽히는 건 슬픈 그의 눈과 대비되는 화려한 드랙퀸(여성 분장을 하는 남성) 분장 때문이다. 풍성한 금발 가발에 반짝거리는 눈 화장은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진짜 삶’을 좇는 한셀의 기구한 처지를 강조한다. 그렇게 ‘헤드윅’의 가발과 메이크업은 주인공의 다양한 면면과 얽히며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고 깊이 있게 전달한다. 2005년 국내 초연 이후 ‘N차 관람’ 열풍을 이끈 ‘헤드윅’의 또 다른 주역인 셈이다.

‘헤드윅’의 가발은 어떻게 탄생할까. 원작자이자 주연으로 무대에 오르고 동명 영화의 감독과 주연까지 겸했던 존 캐머런 미첼이 썼던 가발이 한국 배우들의 머리에 그대로 얹어지는 걸까. 매 시즌, 매 배우가 같은 가발을 쓰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미첼 가발의 큰 틀은 따르지만, 새로 공연되고 배우가 바뀔 때마다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관객들을 맞는다.” 최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만난, ‘헤드윅’ 분장 총괄 채송화 디자이너의 말이다. 채 디자이너는 “시즌이 거듭되는 만큼 ‘헤드윅’ 가발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다”고도 했다.

채 디자이너는 국내 공연 분장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배우 메이크업이 주요 서사 요소로 작용하는 극이라면 대부분 채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는다. 15년 넘게 뮤지컬 ‘캣츠’, 연극 ‘한여름밤의꿈’ ‘패왕별희’ 같은 굵직한 작품들을 맡아왔다.

[저작권 한국일보] 올해 뮤지컬 ‘헤드윅’ 배우들이 쓰는 가발들이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분장실에 진열돼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채 디자이너에게 ‘헤드윅’은 “가장 사랑하고 힘을 쏟는 작품”이다. 그는 가발 제작 첫 단계부터 배우들과 호흡한다. 시즌 마다 새 배우가 영입돼 각기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고, 같은 배우가 다시 무대에 오르더라도 신선한 변주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채 디자이너는 “배우들이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캐릭터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직접 의상이나 분장 사진을 스크랩 해 오기도 한다”며 “의상과 분장 리허설을 하면서도 배우와 상의해 두 번, 세 번 톤을 바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도 배우 5명과 긴 논의를 거쳐 1인당 4개씩, 가발 20개를 준비했다. 나비 모양을 닮은 메인 가발부터 아름다움을 뽐낼 긴 머리 가발, 펑크 가발 등 형태도 다양하다.

제작 과정도 까다롭다. 연기 중에 가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배우의 이마와 머리를 따라 본을 뜬다. 배우마다 어울리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논의를 통해 모질, 머리 색, 길이, 웨이브 정도, 앞머리 유무 등을 결정한다. 이후 국내에 몇 안 되는 특수가발제작 공장을 섭외해 디자인을 보낸다. 한 올 한 올 머리를 궤는 방식으로 제작하는 세밀한 작업이라 완성에만 한 달이 넘는다. “인조 가발엔 열을 대면 안 되기 때문에 드라이기를 쓸 수 없어요. 대신 분장팀이 손으로 웨이브를 만들어요. 공연이 끝난 후 헤어롤로 일일이 말아 뒀다가, 다음 날 공연 시작 전 손에 에센스를 뭍혀 슬슬 풀어 모양을 잡습니다.” 채 디자이너는 “배우와 함께 가장 먼저 극장에 도착해서 제일 늦게 떠나는 게 분장팀인 이유”라고 덧붙였다.

2006년 '헤드윅' 공연 당시 헤드윅을 연기한 배우 조승우(왼쪽부터)와 김다현, 송용진, 오만석이 각기 다른 가발에 다른 복장을 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해 뮤지컬 ‘헤드윅’ 주연을 맡은 배우들과 가발. 왼쪽부터 정문성, 전동석, 오만석, 윤소호. 쇼노트 제공

올해 ‘헤드윅’ 가발은 화려함을 한층 더했다. 배우 오만석은 그의 구릿빛 피부에 맞는 밝은 금색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하되 곳곳에 레몬 색 그라이데이션을 넣어 화려함을 뽐낸다. 반면 피부가 밝은 전동석의 메인 가발은 핑크 그라데이션이다. 정문성은 거의 흰빛에 가까운 금발로 섹시함을 더했다. 채 디자이너는 “정문성 배우는 본인이 먼저 제안을 해 다른 배우가 안 쓰는 단발 가발에 유일하게 도전했다”며 웃었다. 가발에 맞는 화장을 해야 하니 메이크업 과정도 만만치 않은데, 오만석의 경우 눈 화장에만 금색, 핑크색, 청록색, 보라색 등 일곱 가지 색깔이 쓰인다. 보통 극의 남성 주인공 메이크업은 길어야 30분이면 끝나지만, ‘헤드윅’은 1시간10분을 쏟아야 한다.

[저작권 한국일보] 채송화 디자이너가 지난달 23일 뮤지컬 '헤드윅' 배우 전동석의 메이크업을 준비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헤드윅’ 전문가로 인정 받은 채 디자이너는 미첼 감독이 내한했을 때마다 동행해 왔다. 2007년 미첼 감독이 한국을 찾아 한복을 입었을 때 쓴 금발 어여머리(조선시대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땋아 말아 올린 머리) 가발도 채 디자이너의 손에서 나왔다. “다른 공연은 막이 내린 뒤에 관객들이 메이크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헤드윅’은 달라요.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메이크업이 너무 예쁘게 잘 됐다’ 혹은 ‘자신의 맘에 안 든다’ 하는 소감들이 잇따르거든요. 보고 또 보는 마니아가 많은 작품인 만큼 안주하지 않으려고 해요. 또 다른 ‘헤드윅’의 모습을 상상하면서요.” 올해 ‘헤드윅’은 11월 3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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