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자극적 단어 조합에 쓴웃음이 났다. 이 주제라면 이영훈(서울대)이 언젠가 썼던 표현 ‘트레이드 오프(Trade-Off)’ 얘기를 하는 게 좋겠다.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데 도움된다.
트레이드 오프란 간단히 말해 ‘퉁치기’다. 가령 이런 식의 논리 구성법이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암울했다고? 궁정동에 총소리가 울렸을 무렵 감옥에 있던 정치범은 불과 100여명 내외였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닦은 중차대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유신의 암울함이야 100여명의 정치범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자, 이 말이다.
일제시기 논란도 그렇다. 그래, 일제가 나빴지, 식민지배자니까, 그런데 일제가 한국에 남긴 인력과 공장이 하늘로 솟았겠니 땅으로 꺼졌겠니, 그거 받아먹고 한미일 반공동맹 아래 국제분업 하청 일자리에서 시작해 이만큼 먹고 살게 됐지 않았니, 그렇다면 이런저런 피해야 그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자, 이 말이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개별 피해자들의 구체적 증언은 외면하면서 ‘실증’이란 이름으로 공식문헌, 통계, 숫자를 내세우는 이유는 여기 있다. 퉁치기 위한 전제조건, 그러니까 ‘그 정도로’라 말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공식문건에다 ‘사실 이게 다 쟤네 등골 빼먹으려고 하는 짓이야’라고 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참고로 임지현(서강대)은 이런 논리를 ‘부정의 실증주의’라 부른다. ‘히틀러의 명령서가 없으니 아우슈비츠는 거짓’이라는 식의 논법이다.
만주국이라는,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같은 이들이 꿈꾼 ‘일본식 제국의 꿈’이 박정희 근대화의 원형이었다는 류의 얘긴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 이전에 현실이 그러했다는 얘기다. 여기서 분기점이 생긴다. 이런 얘기는 역사책에 짙게 배어 있는, 피와 돈 냄새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을 흥분시킨다.
무조건 나쁘다 욕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은 정의가 흘러 넘치는 논리적인 도덕교과서가 아니기에 음미할 대목도 존재한다. 때론 매력적이기도 하다. 특히 이 세상의 비밀스러운 작동원리를 알려주겠다는, 좌파든 우파든 프로메테우스 놀이를 하고픈 이들에겐 더 호소력이 짙다. 문제는 그 수준을 넘어 아예 피와 돈에 도취된 듯한 태도를 보일 때다.
트레이드 오프는 새로울 게 없는 논리다. 이미 숱하게 봐왔다. 세월호 참사 피해를 보상금으로 퉁치자던 온갖 이야기들, 이런저런 모욕을 다 쏟아내고도 그걸 고용과 월급으로 퉁치던 오너 일가의 갑질 등등. 오구마 에이지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동아시아)을 인용한 조은(동국대)의 탄식처럼 ‘반일 종족주의’란 ‘타자에 대한 상상력’ 결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반일 종족주의’가 진정 새로운 지점은, 홍준표 전 대표조차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적나라함’ 정도다.
트레이드 오프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논리다. 히틀러가 졌다고 아우토반 걷어 냈던가. 스탈린도 가난한 농노의 나라를 핵무기 보유국으로 바꿨다. 독일은 히틀러근대화론, 러시아는 스탈린근대화론인가. 북한도 가능하다. 미국과 잘 풀려 경제 성장만 좀 되면 ‘네이션 빌딩’ 과정의 여러 문제는 아오지 탄광 몇 백 명쯤으로 퉁치는 이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건 ‘주체 근대화론’쯤 되려나. 이건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유리하다. ‘자학사관에 찌든 우(!)편향 검인정 교과서 논란’ 따윈 있을 수 없을 국정교과서 체제니까.
궁극적 질문은, 인간 삶을 통계 하나로 재조립할 수 있는가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과 그게 전부라는 건 엄연히 다르다. 그 간격을 조심스레 더듬지 않고 남들을 무슨 미개인 취급하듯 반일 종족주의라 멸시한다면, 혹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극심하게 부족한 소시오 패스적 세계관 아니냐고 되물을 수 밖에.
조태성 사회부 차장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