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반대’ 서울대 촛불집회에서 발언 기회를 가진 학생들이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반복한 말이 있다. 바로 ‘나는 보수가 아니다. 청년들이 보수화돼서 조국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는 항변이다. 이들은 오히려 김기춘과 우병우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박종철 열사를 존경하고,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들을 향해 최근 여권이 쏟아낸 메시지는 과연 이게 진보의 주장이 맞나 싶을 정도다. “서울대 촛불집회에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의 손길이 어른거린다” “촛불을 들었다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입시 공정성이 훼손됐다며 촛불을 든 청년들을 향해 비수를 꽂는 행태는 ‘진보 꼰대’라는 단어 아니면 설명할 도리가 없다.
지금 여권의 ‘조국 구하기’는 외눈박이거나 아예 눈을 감은 채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모습이다. 심지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조국 사태는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 영웅의 몰락 구조와 닮았다”고 말했다. “조국만큼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었던 소위 명문대학 출신 많은 기자들이 분기탱천해 나선 영웅 죽이기”라는 그의 비유대로라면 조 후보자를 향한 어떤 비판도 가짜 뉴스가 된다. ‘근조한국언론’ ‘한국기자질문수준’같은 조롱 섞인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건 그의 주장이 먹히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날 26일 발표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사퇴 찬성이 60.2%까지 올라가자 여권이 내놓은 논리는 조 후보자가 ‘직접’ 책임질 불법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딸의 논문 제1저자 등재와 장학금 수령, 웅동학원과 사모펀드 의혹 모두 조 후보자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고위 공직자 검증에서 직접 책임만 따져 물었던가.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3월 재개발 단지에서 매입한 20억원대 건물을 두고 투기 의혹이 제기돼 낙마했다. 평생 무주택자로 살아온 아내가 재개발 뒤 아파트와 상가를 분양받을 계획으로 자신과 상의하지 않고 한 일이었다. 지금 여권 논리대로라면 은행 대출 받아 노후를 위해 정당한 부동산 투자를 한 김의겸이 내려왔어야 할 이유는 없다.
‘조국 감싸기’의 결정판은 2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패싱하고 기자간담회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초유의 셀프 청문회다. 금수저와 강남좌파로 대표되는 조 후보자가 입시 공정성이라는 국민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진정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정면 돌파하자는 게 여권의 의도였을 게다. 하지만 “의혹이 해소됐다”는 여권의 일방적 선언과 달리 8시간 20분에 걸친 간담회는 “몰랐다” “불법은 없다”는 의미 없는 해명으로 일관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후보자가 몰랐다고 하면 더 추궁할 방법이 없는 형식의 한계는 둘째치고, 야당을 내팽개치고 진행한 일방적 검증은 조국 임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가 있다.
얼마 전 판사 출신인 신평 변호사가 자신을 대법관으로 밀었다는 조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면 잘 보이지 않지만, 기득권 세력과 그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면 희한하게 잘 보인다”는 구절이었다. 여권이 진영 논리로만 조국 문제를 바라보니 국민 인식이나 감정과 괴리가 생긴다는 따끔한 질책이다. 실제로 국민 눈에는 조 후보자가 딸을 위해 기울인 정성이 여권이 그렇게 모질게 비판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딸 특혜 채용 노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금 청와대 비서실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2월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가 걸려 있다. 다른 사람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이다. 과연 누가 조국 사태 앞에서 춘풍추상 정신이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여권도 한번 준엄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조국 비판의 목소리를 진영 논리로 치부하고 지지층만 보면서 가려 했던 건 아닌가. 이렇게 누더기가 된 채라도 그만이 사법개혁의 적임자라고 정녕 믿는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왜, 기어이 조국을 지키려는 것인가.
김영화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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