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건축상 대상
‘문화비축기지’ 허서구 건축가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문화비축기지는 박정희 정부가 1차 오일쇼크 뒤 만든 석유비축기지를 문화시설로 바꾼 곳이다. 석유탱크 5개에 당시 서울 한 달 석유 사용량인 40만배럴을 비축하도록 지은 그곳은 주변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면서 폐쇄됐고 2017년 공연장 강의실 등으로 탈바꿈해 일반에 공개됐다. 설계자는 허서구(62) 건축가와 건축사 사무소 RoA. 올해 서울시 건축상 대상에 선정됐다.
“요리사한테 음식 만들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물어보면 재료라고 말할 거 같은데요.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중요한 건 장소가 갖고 있는 원형의 조건이죠. (그 점에서 문화비축기지는) 이미 현상공모 때부터 건축계에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최근 마포 문화비축기지에서 만난 허서구 건축가는 문화비축기지 현상공모가 한창이던 2014년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양대 건축과에 출강했던 허 건축가는 담당 학생이 문화비축기지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수상하면서 현상공모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공모가 발표되고 전체 현장 설명회 할 때도 안 갔어요. 뒤늦게 개인적으로 (석유비축기지를) 가 봤는데 현장을 보자마자 설계 콘셉트가 머릿속에서 다 정리돼 공모했죠. 운이 좋았어요. 국제설계공모라 95개팀이 지원했더라고요.”
허서구 건축가는 문화비축기지 설계에 영향받은 작품을 묻는 질문에 “그동안 해 온 설계 작업 전부”라고 답했다. 그는 ㈜유유산업의 안양 제약공장을 리모델링한 김중업건축박물관 초기 설계, 청주 연초제조창을 미술품 수장고로 바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설계에 참여했고 최근 당인리 발전소 문화공간 설계 공모에도 참여해 가작에 뽑혔다.
5개의 석유탱크는 오일쇼크 당시 유종별 소요량을 파악해 한 달 필요한 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 만들었다. “탱크를 만드는 과정이 이야기이고 우리의 역사”인 셈이다. 허 건축가는 “문화비축기지 구축 과정은 석유비축기지 구축 과정의 역순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낡고 녹슨 채 버려진 기름 탱크를 파내는 과정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도면도 없어 애를 먹다가 경북 청도의 문서 보관소에서 뒤늦게 도면을 발견하기도 했다. 문화재 발굴과도 같은 작업 과정 때문에 ‘건축의 고고학’이란 별칭이 따랐다.
“축구 잘하는 선수는 공을 어디로 주면 어떻게 간다, 이런 그림이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으로 다 들어 있잖아요. 빈자리 찾아서 공차는 게 아니고. 건축가가 현장 설계할 때도 똑같아요. 나갈 방향의 그림이 떠올라야 설계가 진행돼요. 석유비축기지 봤을 때 첫 이미지 컷은 절벽 벌어진 틈으로, 지금(리모델링한) 석유탱크가 보이는 장면이었죠.”
허씨는 석유비축기지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탱크별로 쓰임을 차별화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때 허씨와 함께 설계한 RoA는 그의 제자, 설계사무소 직원이 주축이 돼 만든 건축사 사무소다. 허씨는 “이 친구들이 성장한 걸 지켜본 것, 공공건축 과정에서 ‘집단지성’이 순기능으로 발휘된 드문 사례란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가장 크기가 작은 1번 탱크는 통유리로 바꿔 방문객들이 탱크 내부와 외부 방호벽을 한번에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큰 2번 탱크는 원형의 야외 공연장으로 재탄생 시켰고, 3번 탱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 과거 석유비축 장소로 활용된 과거를 보여줬다. 4번 탱크는 내부 느낌을 그대로 살린 기획전시장으로, 5번 탱크는 비축기지의 역사와 재탄생 과정을 담은 상설 전시장으로 각각 변신시켰다. 1번 탱크와 2번 탱크가 이동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6번 탱크는 카페와 회의실 등으로 꾸몄다. 허씨는 “문화비축기지는 5개 탱크가 어울려 만드는 전체적인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 서울 한 달 치 석유 비축량이 지금의 반나절 사용량도 안 돼요. 그게 너무너무 소중해서 돌산을 깎아, 북한에서 미사일 쏘는 걸 대비해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잖아요. 설계 내내 그때 사람들이 가졌을 절박함이 너무 짠하더라고요. (석유비축기지는) 그 시절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건물이죠. (새로 구축한 문화비축기지는) 그때 그 절박함, 지금 느끼는 격세지감, 그 수십년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에 중점을 뒀죠.”
허 건축가는 문화비축기지가 건축적으로 의미를 인정받는 것보다도 앞으로 이 공간이 설계의 취지를 살려 운영되고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설을 정비하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해나가는 과정에서 설계한 건축가가 지속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건축상 시상식은 6일 문화비축기지 T2 공연장에서 열린다. 이날부터 22일까지 문화비축기지 T6 전시장에서 수상작 전시가 이어진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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