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려면 먼저 공간을 바꿔야 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양재혁(41)ㆍ정혜윤(35) 부부가 두 아이(7세ㆍ4세)를 데리고 4년 전 제주에 온 이유다. 대학 강사인 양씨는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삶의 가치가 달라졌고 제주를 택했다”며 “교수가 되고 싶은 나의 목표를 이루기보다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제주에 정착하기 위해 아내는 임용고시를 준비했고, 제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부부가 처음 정착한 곳은 관리하기 편하고, 마트와 병원, 어린이집 등 생활편의시설이 가까운 제주 시내 외곽의 한 신축 빌라였다. 아는 이 한 명 없던 부부에게 빌라는 여러 명의 이웃을 만들어 줬다. 자연과도 가까웠다. 집 앞에 나가면 꿩이 노닐었고 노루도 뛰어다녔다. 부부는 “제주가 영화관이나 백화점같이 즐길 공간이 상대적으로 적어 심심해 보이지만,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느라 무척 바빴다”고 말했다. 제주에 적응이 끝나갈 무렵 큰 아이의 학교를 알아보다 제주 북동쪽 구좌읍 동복리에 위치한 아담한 동복분교를 보고 홀린 듯 땅(366㎡)을 샀다. 관광지와 떨어져 있는 옛 동네여서 땅값도 쌌다. 부부는 “학교 옆에 작은 집을 지어 아이들을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제주에 온 뒤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 안에서도 제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서울내기 부부의 집이 완공됐다.
◇바랜 듯 깊은 ‘제주의 색’ 입은 집
길이 23m에 폭 5m인 직사각형의 세련된 단층집은 제주의 옛집들 사이에 낯설지 않게 어울린다. 집은 형태보다 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밀조밀한 주택가에 놓인 집 입구에는 높이가 180㎝의 검은 현무암 돌담이 미로처럼 두 번 꺾여 있다. 돌담 너머 살짝 올라온 집은 온통 먹색이다. 정원에 심어진 귤나무와 동백나무, 남천나무, 사철나무, 백미향, 찔레나무, 먼나무 등의 청록색과 연두색 잎사귀가 검은색 벽을 배경으로 도드라진다. 집 설계와 디자인을 맡은 안광일 100Aassociates 대표는 “집에서도 제주의 느낌을 받고 싶어 했던 부부의 집을 짓기 위해서 우선 ‘제주스러움’을 찾아봤다”며 “그러다 제주 민속촌에 갔는데 다른 곳과 집의 형태나 재료는 비슷했는데, 색감이 확연하게 달랐다”고 말했다.
기와와 단청, 나무 등의 색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짙고, 강하면서도 독특했다. 같은 검은색이어도 제주의 색은 좀 더 먹색에 가까웠고, 같은 붉은색이어도 제주는 감청색에 가까웠다. 바랜 듯하면서도 깊은 느낌이 났다. 건축가는 제주 출신 미술작가의 작품도 둘러봤다. 먹색 스프레이로 여러 차례 뿌려 거친 느낌을 낸 집 외관은 제주의 작가가 비바람이 치는 바다를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의 색이다. 안 대표는 “다른 지역에도 있는 돌담이나 귤나무가 제주다워 보이는 것은 형태가 아닌 색 때문”이라며 “집에서도 제주의 색을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검은 화강석 욕조를 들인 화장실이 대표적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큰 욕조를 두었지만, 검은 화강석 욕조와 돌을 다듬어 만든 세면대 등으로 제주의 느낌을 한껏 냈다. 화장실에 큰 창을 내 먼 바다와 하늘, 나무 등 제주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3면이 유리창으로 이뤄진 거실 겸 주방도 제주의 자연적인 색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다. 안 대표는 “제주는 비바람이 강해 날씨에 따라 풍경이 매우 다르다”며 “풍경 변화를 시시각각 감상할 수 있게 통창을 냈다”고 말했다. 부부는 식탁에 앉아 달빛을 받는 돌담과 나무들을 감상할 때 제주에 온 게 가장 실감난다고 했다. 부부는 “굳이 한라산이나 성산일출봉에 가지 않아도, 돌담과 나무, 하늘만 봐도 여기가 제주도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가족이 좋은 시간을 함께 하는 집
긴 직사각형 형태인 집에는 입구부터 거실 겸 주방, 큰방, 중정, 화장실, 작은방이 일렬로 놓여 있다. 거실 겸 주방에서 제주의 풍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고, 큰방과 작은방에서도 창을 통해 각각 중정과 뒤뜰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다. 집은 95.93㎡(29평)로 지어진 주택치곤 작지만, 어디에 있든 제주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각 공간을 연결하는 긴 복도는 깊은 공간감을 줘 더 넓어 보인다.
각 공간에서 제주를 감상할 수 있게 풍경을 한껏 끌어들였지만 기능은 최소화했다. 거실과 주방은 경계를 두지 않고 연결돼 있다. 3면이 통창인 데다 각 방에도 창과 문이 많아 안팎의 경계도 희미하다. 안 대표는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주택은 폐쇄적일 수밖에 없지만, 제주도라는 특수성을 살려 매일매일의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 집을 달리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며 “집에 사는 이들이 돌담과 조경, 커튼 등을 이용해 원하는 대로 집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입구의 높은 돌담, 통창의 커튼, 주변과 경계에 심은 나무 등이 외부 시선을 어느 정도 차단한다.
집은 단출하지만 집중력이 높다. 부부는 “주위가 온통 어두워지는 밤에 식탁 위 조명을 켜면 이곳에 집중도가 높아진다”며 “그런 환경에서 서로 대화하고, 식사하면 정말 우리 가족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생긴 것 같아진다”고 말했다. 집을 지은 후 이런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부부는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아 ‘시호루(時好樓)’라고 이름 붙였다. 집은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인 독일 ‘2019 iF 디자인 어워드(레지던스)’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가족의 삶도 집처럼 단단해졌다. 서울에서는 부모, 형제들로부터 일상생활과 육아에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었지만, 제주에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부부가 모두 알아서 해야 했어요. 한동안은 아이들도 혼란스러워했고, 우리도 삶의 방향을 맞추느라 많이 다퉜어요. 그러다가도 사회의 잣대에서 멀어진 이곳에서 우리 삶을 많이 돌아볼 수 있게 됐고, 이제는 어디에 있어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집도 지었잖아요.”
제주=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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