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경남 함안 가야읍과 함안면
함안 가야읍 함안연꽃테마파크의 ‘아라홍련’. 2010년 700년만에 발아시킨 연꽃 씨앗의 후손이다. 함안=최흥수 기자

함안에 가까워질수록 엉뚱하게 ‘함안댁’이라는 세 글자만 입가에 맴돌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함안댁(이정은 분)은 주인공 ‘애기씨’를 보좌하는 재치 있고 순박한 인물로 그려진다.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에도 함안댁이 등장한다. 몰락한 양반인 김평산에게 시집 와 온갖 수모를 견디지만, 남편이 살인 죄인으로 처형당하자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린다. 성정이 순하지만 도리에 강직했던 함안댁은 그 때문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함안 땅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참 편안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함안은 전형적인 남고북저(南高北低) 지형이다. 남쪽에 우뚝 솟은 여항산(770m)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북측의 남강 사이에 형성된 평야가 넓고도 푸근하다.

◇말이산 고분군과 아라가야의 향기, 가야읍

함안군의 행정 중심지는 함안이 아니라 가야읍이다. 군청을 비롯한 관공서가 대부분 가야읍에 있다. 가야읍과 이웃한 함안은 면 소재지다. 1923년 경전선 함안역이 지역 양반들의 반대로 가야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현재 KTX 함안역은 다시 함안면으로 이전됐다.)

가야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함안은 아라가야의 중심이었다. 아라가야는 4세기 무렵 변한의 안야국이 성장해 형성된 고대국가로 560년쯤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의령 진주의 일부를 영역으로 하는, 가야 6국 중 하나였다.

가야읍 남측 말이산 고분군. 37기의 아라가야 고분이 2km에 걸쳐 연결돼 있다.
세월의 무게에 내려앉은 봉분이 오히려 자연스런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유적은 말이산 고분군이다. ‘말이’는 ‘(우두)머리’에서 변형된 말로, 변한시대부터 치면 말이산 고분군은 약 500년간 일대를 장악한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다른 가야국과 마찬가지로 아라가야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제강점기 발굴 과정에서 일부 고분이 훼손된 이래, 국내 연구진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한 건 1986년이다. 현재까지 대형 봉분 9기를 포함해 약 200기의 발굴 조사가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토기 철기 장신구 등 8,000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됐다. 아라가야 고분은 말이산 외에 가야 읍내를 둘러싼 야산에 두루 분포하고 있어 모두 합하면 1,000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군청 뒤편에서 연결된 말이산 고분군엔 현재 37개 고분을 연결하는 2km에 걸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기껏해야 해발 100m 미만의 능선이어서 전 구간을 걸어도 별로 힘들지 않는다. 고분군 탐방은 함안박물관에서 시작한다. 정면에서 보면 박물관 건물 한가운데의 흙빛 타워가 눈길을 잡는다. 좋게 보면 첨성대를 변형한 모양 같고, 낮잡아 보면 공장 굴뚝처럼 투박하다. 타워의 정체를 알려주는 힌트는 중앙에 불꽃 모양(언뜻 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한다)으로 뻥 뚫린 구멍이다. 전시실에는 1,500년 동안 묻혀 있던 아라가야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토기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통모양굽다리접시’ ‘불꽃무늬굽다리접시’ ‘손잡이잔’ 등 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은 4~5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접시든 그릇이든 등잔이든, 다양한 토기 받침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불꽃 문양이다. 가운데에 불꽃 문양 구멍이 뚫린 받침대는 대부분 안정감 있고 단아한 원뿔 모양인데, 박물관 정면의 상징탑은 원통에 가까워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썼더라면 아라가야의 상징물로 손색이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말이산 고분군 아래 위치한 함안박물관. 건물 중앙에 불꽃 문양 받침대를 형상화한 탑이 서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불꽃문양굽다리접시’.
함안박물관에 전시된 아라가야의 ‘굽다리등잔’.

산책로는 박물관 뒤편에서 능선으로 완만하게 연결된다. 가장 먼저 만나는 무덤은 표면적에 비해 봉분이 높지 않고 펑퍼짐하다. 오랜 세월 서서히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여서 오히려 곡선이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다른 봉분도 규모가 크지 않아 인위적인 위압감이 없다. 그래서 말이산 고분군 산책로는 자체로 소풍 코스다. 무덤 주변 넓은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펼쳐도 좋고, 해질 무렵 노을을 배경으로 커피나 맥주 한잔을 기울여도 그만이다. 능선 북측에 서면 가야읍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편으로는 서서히 가을로 물들어가는 넉넉한 들판이 펼쳐진다.

연꽃테마파크의 아라홍련. 개화 막바지에 접어 들었지만 아쉽지 않을 만큼 피어 있다.
꽃받침에서 봉오리로 갈수록 분홍빛이 짙어지는 아라홍련.
연꽃 감상은 안개가 끼는 이른 아침이 제격이다.
공중에서 본 함안연꽃테마파크.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여러 갈래로 산책로가 나 있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함안연꽃테마파크’ 역시 아라가야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곳이다. 연꽃과 수생 식물로 뒤덮인 연못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 1.5km가량으로 아담한 규모지만, 이곳에는 특별한 연꽃이 심겨져 있다. 2009년 함안면과 가야읍 사이에 있는 성산산성 유적지 내 연못에서 연 씨앗이 다수 발견됐다. 이중 두 알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약 700년 전 고려시대 말의 씨앗으로 밝혀졌다. 함안박물관과 함안농업기술센터는 씨 담그기, 씨 틔우기, 분갈이 과정을 거쳐 이듬해 7월 붉은 빛이 감도는 연꽃을 피우는데 성공했다. 함안군은 이 연꽃을 ‘고려연꽃’이라 하지 않고 아라가야의 땅에서 피어났다는 의미로 ‘아라홍련’이라는 이름했다. 작은 씨앗 속에 잠들어 있던 아라가야의 색과 향이 오랜 기다림 끝에 함안 땅에 다시 그윽하게 피어난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면 흔히 보는 연꽃과 차이를 구분하기 힘든데, 함안군에서는 꽃받침에서부터 봉오리까지 꽃잎 색깔이 흰색에서 진분홍색으로 점점 짙어지는 특징이 있다고 자랑한다.

연꽃 연못에서 먹이를 찾는 왜가리.
오리 가족이 연꽃 연못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앙증맞고 하얀 어리연꽃.

연꽃테마파크에는 아라홍련 외에 인근 법수면 옥수 늪에 자생하는 ‘법수홍련’, 시조시인 이병기의 호를 딴 ‘가람백련’, 널따란 잎에서 분홍빛 꽃을 피우는 가시연꽃과 앙증맞은 어리연꽃 등이 함께 심겨져 있다. 한여름이 지나 백련은 이미 볼 수 없고 홍련도 절정기를 넘긴 상황이지만, 늦게까지 피어나는 꽃송이가 있어 아쉽지 않을 만큼 감상할 수 있다. 볕 좋은 한낮에도 꽃잎 빛깔이 곱지만, 연꽃 구경은 아무래도 이른 아침이 제격이다.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분홍빛 등처럼 피어난 연꽃이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쇠물닭과 오리 가족이 넓은 연 잎 덤불로 몸을 숨기고, 왜가리가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면이어도 ‘읍내’, 함안면의 애처로운 자존심

함안은 면소재지여도 ‘읍내’로 통한다. 함안 군민들도 ‘읍내에서 만나자’ 하면 가야읍이 아니라 응당 함안면 소재지로 알아듣는다. 가야읍에서 불과 4km 떨어져 있다. 가야읍에 행정 중심지 역할을 내줬지만, 함안면은 여전히 함안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가야읍에서 함안면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무진정. 정자보다 연못과 정원이 더 아름답다.
돌담에 둘러싸인 무진정.
왕버들이 운치있게 그늘을 드리운 무진정 아래 연못과 정원.

함안면 초입 성산산성 끝자락에 무진정(無盡亭)이라는 멋들어진 정자가 하나 있다. 조선 중종 때 사헌부 집의(執義ㆍ정삼품 벼슬)와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한 조삼(趙參)이 후진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앞뒤로 툇마루를 길게 빼고 중앙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민 현재의 정자는 1929년에 중건한 것인데,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초기의 정자 형식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축과 땅의 기운에 문외한인 여행객의 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자보다 바로 아래의 인공 호수와 정원이 훨씬 근사해 보인다. 다리로 연결된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에는 왕버들 대여섯 그루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늘어뜨렸고, 개구리밥을 비롯한 수생식물이 연못을 초록으로 뒤덮어 운치를 더한다.

함안초등악교 안에 있는 함안민속박물관 내부. 갖가지 농업과 생활도구가 전시돼 있다.
함성중학교 교문 옆에 주리사 터에서 이전한 5층 사자석탑의 일부가 조경석처럼 놓여 있다.
함성중학교 교문 앞에 역대 함안군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읍내’에도 함안의 자존심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함안초등학교 안에 ‘함안민속박물관’이 있다. 수차와 망태, 베틀, 떡살, 인두 등 전통 농기구와 생활용품이 2개 전시실에 가득하다.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아라가야의 토기도 벽면을 둘러 전시돼 있다. 초등학교 박물관으로는 전국 최고 수준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바로 옆 함성중학교 교정에는 여항산 주리사 터에서 가져 온 ‘주리사지 사자석탑’의 옥개석이 조경 장식처럼 놓여 있다. 애초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돼, 교문 앞에 현대식으로 탑을 복원해 놓았다. 함안향교 역시 이곳이 함안의 중심이었음을 증언하는 표시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구(鄭逑)가 선조 28년(1595)에 세운 향교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0년대에 명륜당과 대성전, 동재와 서재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함안면의 대구식당 쇠고기국밥(7,000원). 면사무소 부근에 서너 곳의 국밥 식당이 몰려 있다.
함안초등학교 앞 ‘해담’ 카페. 한옥을 개조해 최근 개업한 카페로 SNS용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카페 내부 천장에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함안면 민가에 함안읍성의 일부였던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남 함안 여행 지도. 송정근 기자

요즘 함안 사람들이 ‘읍내’에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맛있는 국밥집이 있기 때문이다. 함읍우체국 앞 광장을 중심으로 쇠고기국밥과 석쇠에서 불 향기 가득 머금은 쇠고기 구이를 파는 식당이 서너 곳 있는데, 점심 시간이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함안초등학교 앞 오래된 한옥 주택을 개량해 최근 문을 연 카페도 입소문을 타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늘고 있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실내 장식이나, 소풍을 온 것처럼 꾸민 외부 조경은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곳곳에 오래된 돌담이 남아 있는 마을 골목을 천천히 걸어도 좋다. 개중에는 함안읍성의 일부도 남아 애잔하게 낡아 버린 함안의 전성기를 추억하고 있다.

함안=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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