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 201호 법정. 이곳을 휘감은 공기는 차디 찼다. 늦더위 기운이 남아 있는 법정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다.” 여전히 변호인의 언어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내란목적)살인자의 기억법’을 두둔하며 편들었고, 이를 지켜보던 방청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날까지 모두 6차례 공판이 열렸지만 변호인인 정주교 변호사의 변론 요지는 간단했다. 입증책임이 있는 검사가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직접 물증을 내놓아보라는 것이다. 그간 정 변호사는 5ㆍ18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진 사망자 검시 기록이나 헬기 사격 피해자를 치료한 병원 기록, 헬기사격 장면을 직접 촬영한 사진 등이 있는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변론전략도 여기에 맞춰져 있다. 39년의 세월이 흐른 데다, 5ㆍ18 이후 신군부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과 자료 조작으로 온전한 증거가 있을 리 없다는 자신감도 작용했을 터다. 기껏해야 낡고 해진 증거들로는 헬기사격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변호인의 판단이 깔려 있는 듯 했다.
‘3 대 1.’ 검사가 수적 우위에도 변호사 1명의 논리에 끌려 다니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면서 방청객에선 “후~”하는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정 변호사의 입을 틀어막을 확실한 ‘한 방’을 날리지 못한 데 대한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공판 말미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검사의 주장에 대해 정 변호사가 재판관으로부터 구술 변론 기회를 얻어 기습적으로 반박하자, 재반격에 나선 검사의 입에선 순간 “준비가 덜 돼서…”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간 검사는 시쳇말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했다. 자신감의 발로였다. 실제 검사는 지금껏 5ㆍ18 헬기사격 관련 목격자 등 15명을 법정 증인으로 내세웠다. 판사는 증인 숫자가 많은 쪽의 진술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노린 듯 했다.
그러나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날의 끔찍한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야 했던 일부 증인들이 증언 도중 머뭇거렸고, 변호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를 ‘기억의 왜곡’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목격자 진술을 뒷받침할 물증 등이 없는, 말 그대로 ‘말뿐인’ 상황도 피고인 측의 공격 빌미를 줬다. 그렇다 보니 법정을 찾은 방청객들은 정 변호사의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그의 말이 맞는 게 아니냐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날도 정 변호사는 그 빈틈을 치고 들어갔다. 정 변호사는 1980년 5월 21일쯤 광주로 출격한 헬기에 탄약을 지급하고 이후 복귀한 헬기에 탄약이 3분1가량 비었다고 진술한 육군31항공단 출신 하사관에 대한 증인 신문에선 “당시 헬기가 무장하고 광주로 갔다는 건 증인의 추론이 아니냐”고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증인으로 나선 이번 사건의 고소인이자 고(故)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에겐 “전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고의로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그 근거는 뭐냐”고 따져 묻다가 판사로부터 ‘부적절한 질문’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를 의식한 듯 정 변호사는 조 신부에 대한 반대 신문을 끝낸 뒤 변호인석에서 일어나 조 신부에게 ”신부님께 송구스런 질문을 드려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번 사건 쟁점을 둘러싼 검사와 변호인간 신경전도 재연됐다. 정 변호사는 12ㆍ12 및 5ㆍ18 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죄로 유죄가 확정된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판결 내용을 거론한 뒤 “이번 사건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재판이 돼야 한다”며 검사에게 증거 조사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5ㆍ18 당시 사망자의 검시 조서를 통해 헬기 사격에 의한 사망자가 있는지 등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전 전 대통령의 기억을 바로잡으려는 검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사는 “헬기사격이 없었다는 내란목적살인 공범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헬기사격 목격자의 주장(증언)을 반박하는 건 옳지 않다”며 “실체적 진실은 5ㆍ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냐, 없었냐는 것이지 피고인 당시 광주에 왔냐, 안 왔냐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변호인이 쟁점에 대해 실체적 진실을 넓게 잡으면 (재판이)산으로 간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처럼 검사와 변호인간 지루한 공방으로 재판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사건 당사자의 분노 지수도 끓어오르는 듯 했다. 이날 조 신부는 “분노가 치민다”며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제를 향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한 데 대해 사제들은 모독감을 느낀다. 역사를 왜곡하는 망언 앞에 또 다시 총을 만지는 기분이다. 하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피고인이 더 파렴치한 게 아닌가. 국민 앞에 깊이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다.”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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