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한 사람이 삶의 무늬를 만들어 가는 시기예요. ‘중2병’이라는 말로 희화화돼선 안 돼요. 몸은 갑자기 자라는데 마음은 아직 어리고, 그래서 현실이 혼란스럽게 느껴지죠. 그 시절에 겪는 감정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없어요.”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며 꿀을 찾는 벌새처럼, 영화 ‘벌새’(29일 개봉)의 열네 살 은희(박지후)는 작지만 부지런한 걸음으로 세상을 탐색한다. 남자친구와 입맞춤도 하고, 단짝 친구의 배신에 화도 내고,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낯선 감정에도 휩싸인다. 우등생 오빠와 반항아 언니에게 치이는, 그래서 더욱더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은희의 평범한 일상이 세밀화로 묘사된다. 그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영생할 것만 같던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했으며, 어느 날 아침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1994년이었다.
김보라(38) 감독은 자전적 경험을 담은 이 영화로 개봉도 하기 전 해외 영화제에서 25관왕을 달성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숙한 데뷔작”(베를린국제영화제), “일상으로 시대를 경험하게 한다”(이스탄불국제영화제) 등 호평이 쏟아졌다. 최근 서울 동작구 한 극장에서 만난 김 감독은 “심사위원들이 보내 준 격려 이메일, 영화에서 확장된 자신의 경험을 나눠 준 관객의 목소리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희는 김 감독에게서 출발했지만 보편적 정서와 맞닿는다. 시대 풍경이 아니라 마음 풍경 때문이다. 김 감독은 “공동의 서사를 만들기 위해 내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더하거나 빼면서 치밀하게 직조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구체적인 개인’을 그리겠다고 결심했어요. 대학원 수업 때 한 교수님이 말씀하셨어요. 클리셰를 피하는 방법은 구체성에 있다고. 서사가 구체적일수록 도리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죠. 지극히 구체적인 이야기는 인간의 원형적 감정을 건드려요. 마치 구술사처럼요.”
은희의 일상은 거대한 시대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세상의 파열은 은희의 일상에도 균열을 낸다. 개인사와 시대사가 촘촘하게 엮이며 ‘벌새’는 더 큰 주제를 품는다. “은희가 경험하는 심리적 단절감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물리적 단절과도 연결돼 있어요. 개인이 맺은 관계가 어떻게 가족과 학교, 사회에서의 질서로 이어지고 급기야 다리 붕괴로까지 치달았는지, 개인의 미시적 삶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새’는 은희의 성장 영화이면서, 그와 동시에 경주마처럼 달려 온 우리 사회에 질문하는, 한 나라의 성장 영화라고도 생각해요.”
김 감독은 2005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를 마치고 2007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 졸업 당시만 해도 영화를 만들 엄두도 못 냈다”던 그는 대학원 여자 선배, 여자 동기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여성 영화인들이 주변에 많지 않아서 내가 더욱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요. 환경이 친절하지 않으니 여성은 자신에게 훨씬 엄격할 수밖에 없어요. 저 스스로 과도하다고 느끼는 완벽주의 성향도 그런 영향이 없진 않을 거예요.”
김 감독은 “예술가는 세상의 균열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해야 하는 사람”이라며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불친절하다는 자각이 나를 작가로 성장시켰다”고 말했다. ‘벌새’ 이후 구상 중인 영화도 여성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전쟁의 폐해가 어떻게 일상에 남아 있는지,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를 다루고 싶어요. 흔히 떠올리는 전쟁 영화는 아니에요. ‘여중생의 대서사시’인 ‘벌새’처럼 구체적인 일상에서 확장되는 ‘여성의 대사서시’가 될 거예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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