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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배 저어 굽이굽이…원조 ‘구곡’ 무이산을 가다

입력
2019.08.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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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22>푸젠 고촌 ④무이산과 샤메이고촌 

무이산 풍경구의 표류 관광. 대나무배를 타고 구곡에서 출발해 일곡까지 내려간다.
무이산 풍경구의 표류 관광. 대나무배를 타고 구곡에서 출발해 일곡까지 내려간다.

중국은 유네스코 등재 유산이 55개다. 현재 이탈리아와 함께 공동 1위다. 유네스코 유산은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으로 나뉜다. 둘 다 해당하면 복합유산이다. 중국에서는 ‘쌍중유산’이라 부르는데 모두 4곳이다. 황산, 태산, 아미산과 함께 푸젠 서북부의 무이산이 포함된다.

무이산동역과 버스정류장 안내판.
무이산동역과 버스정류장 안내판.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이 하루가 멀다고 개통하는 중국. 상하이에서 3시간이면 무이산동역에 도착한다. 다시 버스로 1시간이면 무이산국가중점풍경구가 있는 자유소진(自遊小镇)에 당도한다. 입장권과 관광차, 표류 관광까지 365위안(약 6만5,000원)이며 3일간 유효하다. 물론 하루나 이틀 보는 표도 있지만 금액 차이는 10위안이다. 무이산 관광은 하루로 부족하다.

무이산 관광 표지판.
무이산 관광 표지판.
무이정사의 주희 동상과 공자 초상 아래서 책을 든 주희 인형.
무이정사의 주희 동상과 공자 초상 아래서 책을 든 주희 인형.

남문에서 관광차로 이동해 천유(天游) 정류장에서 내린다. 오곡교를 지나 500m가량 걸으면 무이정사(武夷精舍)다. 왼손을 가볍게 든 주희 조각상과 만난다. 주희는 1178년 벗들과 함께 무이산을 유람했다. 굽이굽이 흐르는 구곡계(九曲溪)의 장관을 잊지 못했다. 몇 년 후 전임자인 당중우의 ‘가렴주구’ 작태를 고발했다. 썩을대로 썩은 남송 조정의 작태를 확인하자 벼슬을 내던지고 무이산으로 들어왔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구곡 중 오곡 부근에 무이정사를 건립했다. 강의하던 건물로 들어가니 공자행교도(孔子行教圖) 아래 책을 든 주희가 서 있다.

주희는 무이정사에 머무를 때 ‘구곡도가(九曲棹歌)’를 지었다. 무이산의 절경인 구곡을 모두 10수에 담았다. 일곡부터 구곡에 이르는 계곡을 노 저어 가듯, 인생의 깊은 뜻을 비유한 명작을 남겼다. 후대의 문인은 열창하고 존중했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서도 ‘무이구곡가’는 유행가였다. 구곡의 장관을 한눈에 보려면 천유봉으로 올라야 한다. 10분만 걸으면 관망대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천유봉 오르는 길에 본 구곡계. 관광객을 태운 배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천유봉 오르는 길에 본 구곡계. 관광객을 태운 배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천유봉 오르는 계단과 폭포.
천유봉 오르는 계단과 폭포.

무이산 계곡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나무 배를 타고 유람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구명조끼의 선명한 색감과 뱃사공의 긴 노조차 생생하게 드러난다. 계단을 오를수록 구곡은 더 넓어지건만 기나긴 뱃놀이 유흥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면 천유봉에서 흐르는 폭포가 자기도 봐달라는 듯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암벽 능선을 따라 차곡차곡 다 올라도 여전히 구곡을 가르는 장엄한 뱃길은 멈추지 않는다.

무이산 구곡계의 표류 관광.
무이산 구곡계의 표류 관광.
대나무 8개로 만든 배 두 척을 묶은 ‘주파’.
대나무 8개로 만든 배 두 척을 묶은 ‘주파’.

구곡계 표류 출발지로 이동한다. 대나무 배인 주파(竹筏)를 타고 1시간30분을 유람한다. 주희처럼 일곡부터 구곡까지 ‘구곡도가(九曲棹歌)’를 읊어도 좋다. 다만 거꾸로 읽어야 한다. 상류부터 구곡이다. 구곡에서 출발해 일곡까지 내려간다. 구곡도가의 도(棹)는 노를 의미하지만, 여행객은 노를 직접 젓지 않는다. 여섯 명이 정원인 배에 사공이 둘이다. 배 한 척은 대나무 8개를 꽁꽁 묶는다. 물줄기가 빠르고 계곡이 약간 가파르니 두 척을 서로 연결했다. 앞부분은 파도를 헤치기 쉽도록 불로 달군 후 곧추세웠다. 가끔 뱃사공이 구곡도가를 노래로 불러주기도 한다.

오곡에서 바라본 천유봉.
오곡에서 바라본 천유봉.
관광객을 태운 배가 오곡교 아래를 통과하고 있다.
관광객을 태운 배가 오곡교 아래를 통과하고 있다.
구곡계 바위에 여러 글이 새겨져 있다.
구곡계 바위에 여러 글이 새겨져 있다.

출발하자마자 팔곡이고 암반을 휘돌며 환호성 몇 번 지르니 어느새 오곡이다. 오곡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천유봉이다. 구곡계를 내려다보던 지점이다. 능선을 오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깨알처럼 멀어 보인다. 무이정사로 가던 오곡교를 지나 좌회전 우회전을 반복하며 삼곡을 지난다. 다시 왼쪽으로 돌면 멀리 대왕봉이 보인다. 한차례 깊게 노를 젓던 뱃사공이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길쭉하고 날씬하게 생긴 옥녀봉이다. 주상절리 현상에 의해 셋으로 쪼개진 모습이다.

구곡계에서 본 대왕봉.
구곡계에서 본 대왕봉.
구곡계에서 본 옥녀봉.
구곡계에서 본 옥녀봉.

이름에 어울리는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전설이 생겼다. 옥녀는 선녀다. 구름을 타고 내려와 절경을 감상하던 중 대왕과 몰래 사랑에 빠졌다. 비밀을 알게 된 귀신이 옥황상제에게 일러바쳤다. 옥황상제의 귀천 명령을 거부하고 선녀는 대왕과 부부의 연분을 맺었다. 귀신은 요술을 부려 두 사람을 바위로 만들었다. 구곡계를 경계로 생이별을 시켜 버렸다. 그래도 대왕봉과 옥녀봉은 그림자로 만난다.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 욕향담(浴香潭)은 선녀가 목욕하던 장소이고 인석(印石)이라 새긴 바위는 대왕이 보낸 사랑의 증표라고 믿는다. 옆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 얼마나 애처롭겠는가. 자신의 처지를 두 봉우리에 전달하고 있다. 전설은 그렇게 읽어야 하나 보다.

무이산 전설의 백미는 대홍포(大红袍)다. 대홍포는 따뜻하고 습기 많은 무이산 바위틈에서 자란 무이암차(武夷岩茶) 중에서도 ‘차의 왕’이라 불린다. 옛날에 가난한 수재(향시에 통과한 사람)가 과거를 보러 가는 중 무이산에서 병을 얻었다. 불쌍하게 여긴 승려가 준 차를 마시자 병이 호전됐다. 장원급제도 하고 부마가 됐다. 무이산을 찾아 보은하고자 승려와 함께 차나무를 찾았다. 사원의 승려들과 함께 황제를 위한 공차를 만들어 황궁으로 돌아갔다. 마침 병환이 생긴 황후에게 차를 마시게 했더니 완쾌됐다. 크게 기뻐한 황제는 대홍포를 차나무에 하사했다. 새잎이 돋을 즈음 대홍포를 벗겼더니 붉은 빛이 화사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모두 대홍포가 만든 빛이자 맛이라고 칭찬했다.

대홍포 품종의 하나인 ‘육계’와 어미나무 표시 그림.
대홍포 품종의 하나인 ‘육계’와 어미나무 표시 그림.
대홍포 어미나무 여섯 그루.
대홍포 어미나무 여섯 그루.

대홍포 어미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육계’ ‘수선’ ‘불수’와 같은 품종을 재배하는 차밭을 지난다. 잎 모양과 윤기, 색깔과 강온 여부로 구분하는데 전문가 영역이다. 대홍포를 들고 온 부마가 어미나무 앞에서 감사를 전하는 그림이 보인다. 붉은 글자로 새긴 대홍포 옆에 어미나무 여섯 그루가 암반을 뚫고 자라고 있다. 대홍포를 비롯해 무이암차는 명청시대 이래 최고의 명차로 알려졌다. 무이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차를 집산하고 유통하는 마을은 약 6km 떨어진 샤메이고촌(下梅古村)이다. 풍성한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어 무이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이다.

샤메이고촌에 걸린 만리차도 벽화.
샤메이고촌에 걸린 만리차도 벽화.
강희 57년(1718)년 개업한 경융호.
강희 57년(1718)년 개업한 경융호.
경융호는 지금도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경융호는 지금도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촌의 만리차도(万里茶道) 벽화를 보면 옛날의 영화가 짐작된다. 남으로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북으로 울란바토르와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교류했다. 샤메이고촌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인물은 추무장이다. 1704년 생으로 무이산에서 차나무와 더불어 살았다. 차를 기르고 제조하는 데 능숙했고 사업 수완도 좋았다. 열네 살이던 1718년 개업한 경융호(景隆号)는 날로 번창했다. 1755년에는 산시 상인과 합작을 이끌었다. 최고 상방과의 협력으로 무이암차는 세계시장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랑을 따라 형성된 샤메이고촌.
도랑을 따라 형성된 샤메이고촌.
추씨가사 대문.
추씨가사 대문.
추씨가사 좌우에 ‘수원’과 ‘목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추씨가사 좌우에 ‘수원’과 ‘목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지금도 경융호처럼 찻집으로 운영 중인 민가가 많다. 샤메이고촌은 청나라 초기부터 무이산 차시(茶市)였다. 청나라 고건축이 30채가량 남았다. 1694년 휘주 지역에서 이주한 추씨가 자리 잡은 집성촌이다. 휘주 고건축의 특징인 목조ㆍ석조ㆍ전조의 품격이 예사롭지 않다. 무이산에서 흘러드는 도랑을 따라 촌락이 형성됐다. 도랑 건너에서 바라본 추씨가사(邹氏家祠)는 볼수록 명품이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색감이며 세밀한 조각은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럽다. 암석과 벽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솜씨는 예술의 경지다.

두 개의 쪽문 중 오른쪽에 목본(木本), 왼쪽에 수원(水源)을 전각했다. 나무는 뿌리, 물은 근원이니 초심을 잃지 말라는 취지다. 원형의 전조 속 도안은 각각 문승(文丞)과 무위(武尉)를 조각했다. 자자손손 문인이나 무인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문 바닥에는 문당(門當)인 포고석(抱鼓石)이 있다. 문미의 호대(戶對)에는 약 15cm의 꽃무늬 돌기둥이 있었는데 부서졌다. 대문 앞의 문당호대는 사자성어로 ‘집안의 경제적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비슷해 혼인을 이룰 정도로 서로 격식이 어울린다’는 뜻이다.

대부제 대문.
대부제 대문.
샤메이고촌의 우물, 건정(왼쪽)과 곤정.
샤메이고촌의 우물, 건정(왼쪽)과 곤정.

추씨 상인도 인재를 배출했다. 사당 옆길로 조금 들어가면 대부제(大夫第)다. 추무영과 함께 만리차도를 개척한 추영장의 60세 생일을 맞아 건축했다. 마침 아들이 정사품 벼슬인 중헌대부(中宪大夫) 작위를 받았다. 편액과 대련은 건륭제 시절 대학사 왕걸의 필체다. ‘황제의 은덕이 하늘과 땅만큼 크고 비와 이슬처럼 깊다’니 직설적이라 편하게 읽어본다. 하늘과 땅, 건곤(乾坤)은 팔괘에 속한다. 음양과 풍수를 생각해 촌락을 펼쳤다. 샤메이고촌에는 건정과 곤정 두 우물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우물가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마을 아낙네가 수다를 떠는 모습도 상상된다.

샤메이고촌의 진국묘 대문.
샤메이고촌의 진국묘 대문.
진국묘 대문에 쓰여진 ‘물부’와 ‘민안’.
진국묘 대문에 쓰여진 ‘물부’와 ‘민안’.

도랑을 따라 걷다가 진국묘(镇国庙)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붉은 바탕, 검은 글씨의 대문부터 색다르다. 도대체 누구를 봉공하길래 쪽문에는 물부(物阜)와 민안(民安)이 적혀 있는가? ‘물산 풍부’와 ‘백성 안정’이라니. 과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당나라시대 진국공 작위를 받은 설인귀가 주인공이다. 진국장군 칭호를 받은 아들 설정산, 진국부인 며느리까지 봉공하는 사당이다. 설인귀는 고구려시대 드라마에 가끔 등장한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부임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쫓겨난 인물이다. 그의 고향 산시성 수촌(修村)에서는 아주 형편없이 대우받고 있어서 놀랐다. 전국 어디에서도 설인귀 사당을 본 적이 없다. 무려 1,500km나 떨어진 샤메이고촌에 진국묘가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산시성 위츠(榆次)의 상씨(常氏) 상방이 샤메이고촌에 왔다면 이해가 빠르다. 무이산 차를 외부에 알린 일등 공신이다. 진상팔대가(晋商八大家)로 유명한 상씨는 무이암차의 가치를 알고 추무영 등과 합작했다. 성황을 이룰 때는 매일 대나무 배 300척에 차를 싣고 부두를 떠났다. 샤메이고촌 차 시장에 진입한 진상은 자연스레 재산을 지키고 건강을 살펴 줄 사당을 짓는다. 산시 출신의 관우를 수호신으로 삼아 전국에 관제묘를 지은 상인이다. 설인귀도 산시 출신으로 민간에서 신으로 군림한다.

진국묘의 설인귀 일가 감실에 ‘우순풍조’라 쓰여 있다.
진국묘의 설인귀 일가 감실에 ‘우순풍조’라 쓰여 있다.
진국묘의 국태민안 글씨.
진국묘의 국태민안 글씨.

설인귀 일가를 봉공하는 감실은 크지 않다. 진심을 담아 우순풍조(雨順風調ㆍ비가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는 뜻으로, 농사에 알맞게 기후가 순조로움을 이르는 말)를 빌고 있다. 무이암차는 육로로, 해상으로 만리차도를 따라 세계로 나갔다. 유럽에서는 한때 중국차의 대명사로 불렸다. 상단을 꾸려 멀리 오가는 길에 만나는 비와 바람은 어찌 할 수 없는 하늘의 뜻, 이익이 생명인 상인에게 고향의 영웅을 봉공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설인귀건 관우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국묘는 ‘국태와 민안이면 그만’이라 말하고 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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