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파생상품 투자 국내 금융소비자 피해
KIKO사태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게 문제
푼돈 수수료 챙기려 피해 키운 책임자 밝혀야
미국의 의사 출신 천재 투자가 마이클 버리는 주택시장의 이상 과열에 관심이 생겨 2004년부터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지루한 내용”의 모기지 채권 투자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버리는 130쪽에 달하는 이런 투자설명서를 1년간 수백 개나 훑고 그중 수십 개를 정독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모기지 채권시장의 붕괴를 확신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상환을 보장해 주는 일종의 보험증권인 신용부도스와프(CDS)에 투자하기로 한다. 문제는 그런 상품이 아직 세상에 없다는 것. 그래서 골드만삭스와 도이치뱅크에 전화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CDS’를 만들면 거액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한다. 일정 기한까지 해당 모기지가 부도나지 않으면 보험료에 해당하는 투자액을 모두 날리지만, 부도가 나면 일종의 보험금으로 보험료의 20배 이상을 받는 상품이다. 2007년 말 버리의 전망이 적중하면서 그가 만든 펀드는 10억달러가 넘는 돈을 벌게 된다. 이는 곧 지구상 누군가가 10억달러 이상의 돈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큰돈을 번 투자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빅 쇼트’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은 2015년 영화로 제작돼 널리 알려졌다. 최근 터진 해외 금리연계형 파생결합상품 및 펀드(DLSㆍDLF) 사태의 구조는 버리의 성공담과 흡사하다. 결정적 차이는 한국 투자자들은 잘 알지도 못한 채, 버리와 반대로 독일 국채금리가 안정을 유지한다는 쪽에 판돈을 걸었다 몽땅 날리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판매된 DLS는 주로 JP모건이나 소시에테 제네랄 등 글로벌 투자은행(IB)이 설계했다. 이들 IB는 지난해부터 국제 경기 하락 위험이 커지자 유럽 주요국 국채금리 하락에 대비한 옵션 상품을 만들어 하락 쪽에 투자하는 상품은 주로 유럽 등지에 팔면서, 그 위험을 떠넘기기 위해 국내 증권사에 반대 포지션 상품 발행을 권유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독일 국채 연계 DLS의 경우 일정 기간 금리가 -0.2% 포인트 이상이면 연 4.2% 수익이 보장되지만, -0.7% 포인트 이하로 떨어지면 원금 전액을 날리는 구조다. 피해자들은 은행이 이런 고위험 상품을 “독일 경제의 건전성에 투자하는 안정적 상품”이라고 설명하며 절반가량을 65세가 넘는 은퇴자들에게 판매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날린 1,200억원의 대부분은 반대 포지션을 구입한 유럽 투자자들이 챙겼을 것이다. 이 상품을 판 국내 은행은 투자원금의 1~1.5%인 수수료 15억원 남짓을 벌었을 뿐이다.
국제 파생상품 시장에서 국내 금융소비자들이 호구가 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JP모건이 판매한 동남아 채권연계 상품에 투자했던 한남투신 등 종금사들이 줄도산한 것이 시작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키코(KIKO) 사태로 738개 기업이 3조2,0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2010년에는 도이치은행 홍콩지점과 한국도이치증권이 사전 모의로 옵션 상품을 산 후 장 마감 동시호가 시간대에 약 2조5,000억원의 대규모 매물을 쏟아내며 지수를 50포인트 넘게 급락시켜 국내 투자자에게 4,000억원의 손실을 입힌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금융업계는 CDS나 DLS 같은 파생상품이 투자 위험을 분산하는 데 꼭 필요한 상품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 파생상품은 투자 위험을 금융 지식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글로벌 금융사만 혜택을 보는 방향으로 고안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가 DLSㆍDLF 피해에 대해 “파생상품 설계부터 판매까지 문제는 없었는지, 원금손실 가능성 등의 정보가 투자자에게 상세히 제공됐는지 등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감독 당국으로서는 먼저 판매 은행의 불완전 판매 여부를 조사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이 시급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누가 이런 상품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판매를 허용했는지 밝혀야 한다. 반복되는 잘못은 실수가 아니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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