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이후 재개발 관련 법 개정이 있었으나 현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철거에 저항하는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하는 주변 환경에 목이 졸린다. 23일 오전 막바지 이주가 진행 중인 서울 성북구 길음역세권주택재개발구역 내 풍경이 마치 재난현장을 방불케 한다. 빈 점포엔 여지없이 붉은색의 ‘철거’ 낙인이 찍히거나 간판이 찢기고 경고문이 붙었다. 27일 기준 이주율은 약 80%로 아직 17개 점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붉은 글씨가 어지럽게 그려진 문 닫힌 미용실 앞으로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23일 오후 마을버스를 타려는 시민들의 행렬 위로 간판이 갈기갈기 찢겨 있다.

“대낮에 장정들이 긴 낫을 들고 다니면서 빈집 간판을 찢고 출입문마다 빨간 글씨를 칠한다. 동네 분위기가 험악해지니까 손님이 오질 않아 매출은 30~40%나 줄었다.” 27일 서울 성북구 길음역세권주택재개발구역 내에서 초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윤종훈(47)씨가 말했다. 윤씨는 적절한 보상 없이 이주를 강요하는 조합에 반발해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세입자다. 그는 “주변 환경을 악화시켜 옥죄는 방식으로 세입자를 내모는 행태가 이렇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현실에 너무 화가 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윤씨 말대로 이 일대 미관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다. 줄줄이 닫힌 점포 셔터마다 붉은색 페인트로 ‘철거’ ‘X’ ‘재개발’ 등이 칠해져 있고 유리창엔 한두장이면 충분할 ‘공가(이주 완료 가구)’ 스티커 수십 장이 어지럽게 붙었다. 위태롭게 걸린 간판이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것은 물론이다. 조합은 “간판을 찢거나 철거 표시를 하는 것은 철거 업체에서 알아서 하는 부분”이라고 선을 그었다. 상권이 유지될 리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포는 17곳, 점주들은 영업보상금이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탓에 매출이 나날이 떨어지는 데도 떠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다. 문 닫은 점포들 사이로 난 골목에 들어서면 욕조부터 의자까지 온갖 폐기물이 나뒹굴고 수북이 쌓인 쓰레기에서 악취가 풍겼다. 윤씨는 “식당 뒤편에 방치된 폐기물 때문에 통행이 안 되고 화재 위험도 있어서 구청에 민원을 내면 책임 회피만 하더니 어느 날 ‘민원이 들어왔다’며 위생 점검을 나오더라. 무슨 상황인지…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라며 고개를 저었다.

26일 오후 폐기물이 가득한 골목을 상인이 지나고 있다.
아직 이주를 하지 못한 상가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야채 가게 위에도 현수막이 걸렸다.

1970~80년대 본격화한 철거하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의 대결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길음역 주변의 상황은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간이 곧 돈인 조합과 건설사 입장에선 하루빨리 이주를 마무리하고 철거와 착공의 수순을 밟기 위해 모든 압박 수단을 동원하는 게 보통이다. 그에 반해 점포에 생존권이 달린 세입자들은 권리금 등 투자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기 전에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거대 자본의 승리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약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버거워 보인다. 2008년부터 이곳에서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손주연(51)씨는 마지막 남은 상인들을 모아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철거 반대 현수막을 내걸었다. 일대에서 ‘떡볶이 맛집’으로 소문이 나 단골 고객을 다수 확보한 손씨에게 점포 이전은 곧 손해를 의미한다. 손씨는 “한 손님이 ‘멀리 가지 말고 건너편으로 옮기면 안 되냐’고 하길래 알아봤더니 권리금만 1억 넘게 달라고 하더라”면서 “조합에서 영업보상금으로 2,400만원 정도를 준다는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한숨을 지었다. 개업 당시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약 1억원을 투자한 초밥집 윤씨는 조합으로부터 ‘영업보상금 책정 대상이 아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얼핏 보면 재난상황이 연상되는 동네 분위기는 몇 안 남은 상인들뿐 아니라 이 일대 주민들에게까지 고통을 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1만가구 이상 거주하는 길음 뉴타운의 입구이자 길음역을 끼고 동소문로가 지나는 교통 요지이다 보니 하루 유동 인구가 수만 명에 달한다. 출퇴근 시간 매일 이곳을 지나는 박모(38)씨는 “인근 주민들은 이 지역이 하루빨리 정비되길 바랐지만 이렇게 흉측한 방식으로 진행될 줄 몰랐다”면서 “갈등이 신속하게 해결돼서 깨끗하고 안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북구청 주거환경과 관계자는 “재개발 구역은 사유재산이므로 직접적인 위협을 주지 않는 외관에 대해 별도로 규제할 근거가 없다”면서 “도로나 보도를 점유하거나 안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이상 제재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청소과 관계자도 “이주가 시작된 이후부터 해당 지역은 사유지로 분류되기 때문에 폐기물은 조합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개발 조합 관계자는 “폐기물을 치워도 계속 쌓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처리할 예정”이라며 “추석 연휴가 지나고 나면 공사 가림막이 설치될 예정이라 미관상의 우려는 조만간 해소될 것”이라고 밝혔다.

허강무 전북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현행 도시정비법은 재개발 재건축 시 사업자가 세입자 지원 대책을 마련하면 완화된 용적률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한다. 세입자 보호 조건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인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하위 법령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실질적인 세입자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철거 공사가 임박한 이 일대 풍경을 촬영해 연결해 만든 ‘철거’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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