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다산과 불교와 차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답장의 첫 면. 1806년 6월 7일에 쓴 것이다. 정민 교수 제공
 ◇강렬한 쏠림과 묵은 인연 

다산이 만덕사에서 혜장과 만나 ‘주역’을 두고 하루 밤 토론을 벌인 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한 쏠림을 느꼈다. 며칠만 못 만나도 서운했다. 혜장이 밤중에 몰래 주막집을 찾기도 하고, 다산이 혜장에게 편지를 보내 고성사에서 만나자고 연통을 넣거나, 반대로 혜장이 승려를 보내 다산을 청해오기도 했다. 한번 만나면 며칠씩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주역’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열띤 대화는 서로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다산은 집필 중이던 ‘주역사전(周易四箋)’을 보여주며 혜장의 생각을 물었다. 혜장은 혜장대로 평소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을 토론했다. 이제까지 다산은 초고가 마무리될 때마다 멀리 흑산도의 둘째 형님에게 원고를 보내 질정을 청하곤 했었다. 왕복에 한 달 이상이 걸리는 답답하던 토론 과정에 날개가 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짐작할 수 없었겠지만, 혜장과의 만남을 계기로 강진 시절 다산은 불교의 자장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여기에도 아버지 정재원과 얽힌 묵은 인연의 사슬이 있었다. 다산이 어렸을 때, 청파(靑坡) 혜원(慧遠)이란 승려가 이따금 흥이 나면 작은 배를 타고서 두릉으로 찾아오곤 했었다. 그는 속성이 다산과 같은 정씨(丁氏)였다. 혜원은 전주에 있다가 유람차 광주(廣州)로 올라와 인근 석림정사(石林精舍)에 머물고 있었다. 1년 남짓 그렇듯이 왕래하다가 청파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몇 해 뒤 다산이 16세 나던 1777년, 부친 정재원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자 근처 만연사에 머물던 연담(蓮潭) 유일(有一, 1720-1799)이 찾아왔다. 연담은 화순 출신의 승려로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이 높았다. 각종 불경에 대한 정리뿐 아니라 강학으로도 명성이 대단했고, 시승으로도 이름이 있었다. 정재원의 문집 ‘하석유고(荷石遺稿)’에 이 시기 연담과 주고 받은 시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1778년 가을, 17세의 다산도 연담을 위해 ‘유일 스님에게 주다(贈有一上人)’란 시를 남겼다. 이 시의 1,2구에서 “지난 날 원공(遠公)과 알고 지낼 때, 남두(南斗)의 높은 명성 얻어 들었네(夙與遠公識, 獲聞南斗名)”라고 했다. 다산 부자가 청파 혜원을 통해 이미 연담 유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시와 함께 다산은 ‘지리산 스님 노래를 지어 유일에게 보이다(智異山僧歌示有一)’란 작품을 썼다. 연담에게서 그의 법형(法兄)인 설파(雪坡) 대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기려서 쓴 시다. 이름으로 보아 설파 또한 청파의 법형제였을 것이다. 청파 혜원은 당시 지리산 쌍계사에 머물고 있었던 듯, '하석유고’에 ‘쌍계암 시판 위의 운자를 써서 청파 혜원에게 부친다(用雙溪菴板上韻, 寄贈靑坡慧遠)’란 시가 보인다.

연담 유일의 활달한 필치를 보여주는 시 원고. 만년인 1797년에 쓴 글씨다. 정민 교수 제공
 ◇시 벗이 되어 주게 

아암 혜장은 속성이 김씨이고, 자는 무진(無盡), 호를 연파(蓮波)로 썼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총기가 대단해 불문에 든 지 몇 해 만에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그가 여러 스승을 좇아 불경을 배울 때 일이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스승의 강설을 들었다. 하지만 문을 나설 때는 혼잣말로 늘 ‘피!(呸)’라고 했다. 그들의 강의가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피!’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 바로 연담 유일의 강의였다. 연담 유일은 아암 혜장이 유일하게 인정한 스승이었다. 다산이 훗날 지은 ‘아암장공탑명’에 나온다.

28년 전 연담과의 묵은 인연에 얹혀 다산과 혜장의 교유가 새롭게 이어졌다. 연담은 6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상태였다. 인연이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새로운 인연을 낳았다. 참으로 묘하게 얽힌 인드라망이었다.

혜장과 교유하게 된 다산은 옛날 청파와 연담 두 노승이 떠올랐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인연의 사슬을 떠올려, ‘옛날을 생각하며 혜장에게 부치다(憶昔行寄惠藏)’란 장시를 지었다. 시의 서두는 앞서 설명한 청파, 연담 두 승려와의 묵은 인연을 얘기했고, 중간에는 혜장이 빼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시에는 관심이 없고 깨달음 공부에만 힘을 쏟는 것을 불만스레 여겨, 그가 시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이를 위해 송나라 때 고승 중에 예술 방면에 높은 성취를 보인 승려들을 예로 든 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를 마무리 지었다.

본색 지녀 소순기(蔬筍氣)를 마다하지 아니하니 (不嫌蔬筍帶本色)

쉰 떡이 타고난 자질 해칠까 걱정하네. (秪恐酸饀傷天質)

법 이룸도 법을 깸도 모두가 열반이니 (成法破法皆涅槃)

바람 우레 한번 박차 더욱 애를 쓰시게나.(一蹴風霆受鞭叱)

그런 뒤에 앞선 두 분과 나란히 셋이 되어(然後上與二公成三人)

나와 늦은 사귐 맺어 교칠 같이 지내보세. (成我晩交如膠漆)

소순기는 나물과 죽순으로 채식만 하는 승려의 본색을 가리킨다. 산도(酸饀) 즉 쉰 떡은 여기서는 수행 외의 시문 창작 같은 속사에 대한 잡다한 관심을 말한다. 혜장이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 시문 창작에 냉담하지만, 진정한 열반 즉 깨달음의 경지는 그런 것을 이미 초월한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 앞서 그대의 스승인 연담이나 청파 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대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나와 시로 사귐을 맺는 것이 어떤가 하는 권유였던 셈이다.

대흥사 보련각에 있는 연담유일의 초상.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은 한번 작정하면 될 때까지 밀어붙였다. 다산은 먼저 혜장에게 산중 생활의 흥취를 가지고 시험 삼아 시를 지어보라고 권했다. 혜장이 시큰둥해하자 다산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혜장의 입장이 되어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를 짓고는 이를 혜장에게 보냈다. 시의 서문에 “대개 궁하게 지내게 된 뒤로 언제나 문득문득 절집에서 숨어 지내고 싶은 생각이 나곤 했다. 불법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날은 저물고 길이 막힌 신세를 돌아볼 때 시끄럽고 비루한 곳에서 지내면서 닭울고 개짓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 저쪽을 선망하게 되었던 것이다.”라며 자기 변명을 했다. 이 20수는 모두 다산이 혜장의 시선에 눈을 고정시켜 대신 지은 것이다.

다산이 하도 야단스레 시를 지으라고 종용하자, 혜장은 마지 못해 같은 운자로 ‘산거잡흥’ 20수를 지어 다산에게 보내왔다. 그 중 제 2수를 소개한다.

주렴 가득 산색은 고요 속에 고운데 (一簾山色靜中鮮)

푸른 나무 붉은 노을 눈에 가득 어여쁘다.(碧樹丹霞滿目姸)

사미에게 부탁하여 차를 끓여 내오니 (叮囑沙彌須鬻茗)

원래부터 머리맡에 지장(地漿) 샘이 있었다네. (枕頭原有地漿泉)

이 연작시 20수가 ‘아암유고(兒菴遺稿)’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시 속에 사미승에게 차를 끓여 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차문화 중흥조 다산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난 얼마 뒤 다산은 혜장에게 걸명시(乞茗詩)를 지어 보냈다. 원래 제목은 ‘혜장상인에게 부쳐 보내 차를 청하다(寄贈惠藏上人乞茗)’란 시다. 이 시는 뜻하지 않게 조선 후기 차문화사에 큰 전환을 이끌어낸 작품이 되었다. 다산은 젊어서부터 차에 흥미가 있었다. 이따금이긴 해도 차를 즐겨 마셨다. 그 시는 이렇다.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에 (傳聞石廩底)

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由來産佳茗)

때가 마침 보리 누름 계절인지라(時當晒麥天)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아났겠다. (旗展亦槍挺)

궁한 생활 장재(長齋)가 습관이 되어 (窮居習長齋)

누리고 비린 것은 생각이 없네. (羶臊志已冷)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花猪與粥鷄)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豪侈邈難竝)

더부룩한 체증이 몹시 괴로워 (秪因痃癖苦)

때로 술에 취하면 못 깨어나네. (時中酒未醒)

스님의 숲속 차에 힘을 입어서 (庶藉己公林)

육우의 차 솥을 좀 채웠으면. (少充陸羽鼎)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檀施苟去疾)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奚殊津筏拯)

덖어서 말리기를 법대로 해야 (焙晒須如法)

우렸을 때 색깔이 해맑으리라. (浸漬色方瀅)

유배 이후 섭생이 부실하고 활동이 적다 보니, 어쩌다 술을 마시거나 고기라도 먹게 되면 꼭 체증이 와서 흉복통이 뒤따랐다. 시 속에 자신의 병증을 ‘현벽(痃癖)’이라 했는데, 이는 체증이 오래 묵어 뱃속에 돌덩이가 든 것처럼 느껴지는 증세를 말한다. 이런 체기를 내리는 데는 차만한 약이 없었다.

다산이 혜장에게 써준 '견월첩'에 실린 글씨. 聲菴은 고성암을 말하고 紀勝은 빼어난 일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뜻으로, 즉 고성암에서 나눈 교유를 기록했다는 의미다.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은 만덕사에 갔을 때 근처 산에 온통 차나무가 자생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물어보니 만덕사의 주산인 석름봉 아래 쪽에는 차나무가 더 무성하다고 했다.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좀 만들어 보내달라는 부탁을 넣었다. 혜장은 “늦물 차는 벌써 쇠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덖어서 말리는 것이 잘 되면 받들어 올리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고, 이후 제자 색성과 함께 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색성이 자기가 만든 차를 다산에게 먼저 주자, 혜장은 자기 것을 따로 주지 않았다. 만든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산은 다시 시를 보내 혜장이 만든 것까지 마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두 사람은 이미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허물이 없는 사이로 변해 있었다.

1805년 겨울, 혜장과 색성이 준 차가 다 떨어지자, 다산은 다시 저 유명한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차를 더 보내줄 것을 청했다. 화려한 변려체의 산문으로 차에 관한 각종 고사를 원용해 엮은 이 글은 조선 차문화사의 화려한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글이 되었다. 고려조의 은성(殷盛)했던 차문화는 조선조로 접어들며 완전히 쇠락했다. 다산과 혜장의 교유가 잊혀진 차문화를 다시 중흥의 시기로 바꾸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세 해 뒤인 1808년 다산은 만덕사 너머의 귤동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매년 직접 수백근의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 그의 독특한 구증구포(九蒸九曝), 또는 삼증삼쇄(三蒸三晒) 방식의 제다법이 인근의 대둔사와 보림사 등으로 퍼져나가면서, 종내는 초의차로 이어지는 차문화 중흥의 디딤돌을 놓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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