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예천의 숨겨진 보물, 용문면 금당실마을
금당실마을의 매력은 낮은 담장에 있다. 기와집, 초가집, 개량 주택을 가리지 않고 돌담이 소담스럽게 연결돼 있다. 담장 아래는 온통 꽃밭이다. 예천=최흥수 기자

예천을 찾은 날은 여름 휴가 막바지이자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된 15일 광복절이었다. 붐비는 여행객에 치이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금당실마을도 용문사도 휴가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한가했다. 내성천 물길이 낙동강에 합류하기 전 마지막으로 용틀임하는 회룡포, 경북 북부 세 개 하천이 만나는 지점의 삼강주막 정도가 예천에서 제법 알려진 관광지다. 소백산 자락 용문면은 자연 풍광과 전통에서 그에 못지않은 예천의 숨겨진 보물이다.

◇고향집처럼 푸근한 ‘반서울’ 금당실마을

용문면 소재지, 금당실마을은 담도 낮고 집도 낮다. 예천에서 문경 동로면으로 이어지는 928번 도로변에 있는데, 이정표를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우람한 소백산 줄기가 기세를 한결 누그러뜨려 제법 넓은 분지를 형성한 지점으로, 면사무소와 학교 등 몇몇 건물을 빼면 전부 단층이어서 380여채나 되는 전통마을이 있다는 걸 알아채기 힘들다.

면사무소 옆 돌담길 초입의 안내판과 장승 장식.
면사무소 앞에 ‘용도천문’이라 새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면사무소 앞에는 힘찬 필체로 ‘용도천문(龍跳天門)’이라 새긴 커다란 비석이 놓여 있다. 용이 하늘 문에서 뛰어 논다는 뜻이니 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하늘을 찌른다. 금당실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정감록을 인용해 ‘천하명당 십승지’임을 알리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함부로 무시할 곳이 아니라는 은근한 자랑이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예언서이고, 십승지는 땅의 기운이 좋아 전쟁ㆍ흉년ㆍ전염병 3재가 없는 곳을 가리킨다.

마을 초입 도로변에는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표석도 있다. 금당실(상금곡리)과 이웃한 맛질마을(제곡리)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다는 뜻이다. 큰 강이 없어 서울이 되려다 말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항간에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물색하던 중 금당실이 좋다는 말을 듣고 알아보게 했다고 한다. 결과는 ‘다 좋은데 강이 없어 아쉽다’는 것이었다. 큰 하천만 있었으면 금당실이 조선의 도읍이 될 수도 있었는데 ‘반서울’에 그쳤다는 말이다.

담도 낮고 집도 낮은 금당실마을에서는 양반 고을의 권위나 위압감이 없다.
동네 꼬마 둘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금당실마을은 15세기 감천 문씨 문헌이라는 인물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문씨 집 사위로 함안 박씨 박종린과 원주 변씨 변응녕이 들어와 살았다. 두 집안은 은근히 경쟁 관계였는데, 조선 중종 11년(1516) 박종린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4형제가 잇따라 문과에 급제한 후부터는 함안 박씨가 금당실마을의 실세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북쪽 오미산 자락의 금곡서원에는 박씨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인물의 추도비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지역에선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을 속담처럼 쓴다. 그만큼 선비의 예법과 반가의 문화가 남아 있다는 의미다.

이쯤 되면 양반 고을 특유의 권위가 묻어나기 마련인데, 금당실마을의 골목과 집에는 위압감이 전혀 없다. 오래된 기와집이든 근래에 개량한 주택이든 낮은 돌담에 둘러싸여 한없이 겸손하다. 양반 고을입네 자랑하지 않아도 단정한 품위가 골목 곳곳에 묻어난다.

면사무소에서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바로 소담스런 골목이 이어진다. 가슴팍 높이의 돌담길이 미로처럼 가지를 뻗는다. 흙을 섞어 깔끔하게 마무리한 담장이 있는가 하면, 돌을 생김새대로 올려놓은 담장도 많다. 돌담 위에는 늙은 호박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담장 아래는 채송화 백일홍 맨드라미 봉숭아 등이 예쁘게 피어 어디를 걸어도 고향집 어귀에 들어선 듯 정감이 넘친다. 담쟁이와 능소화 넝쿨이 돌과 담을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덮어 마을 전체가 정원이고 식물원이다. 구석구석까지 마을을 가꾸고 다듬는 데 정성을 들인 주민들의 손길이 서려 있다.

금당실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반송재 고택.
낮은 담장으로 연결된 골목길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담장 위에 늙은 호박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그 골목을 거닐다 보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반송재(조선 숙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김빈의 집), 원주 변씨의 사괴당, 1600년대 후반 권진사가 살았다는 진사당, 1800년대에 지은 우천재와 광서당 등 제법 규모 있는 고택을 만난다. 마을에 기와집만 있는 건 아니다. 예천군의 권유로 최근 단장한 김대기가옥과 유천초옥 등 초가지붕 건물도 있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 개량한 슬레이트 지붕 주택도 섞여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금당실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다.

대신 골목으로 들어서면 기준으로 삼을 높은 건물이 없어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마을 규모는 남북으로 1km 남짓이지만 골목길을 모두 합치면 약 7.5km에 이를 정도로 복잡하다. 스승님 댁에 아침 문안 왔던 서생이 방향을 잃고 골목길을 헤매다 점심과 저녁까지 얻어 먹고 다음날 떠났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북측 오미봉(200m)에 오르면 마을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서울’은 아무래도 허풍이라 여겼는데, 오미정 처마와 소나무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금당실마을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난다. 사극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것처럼 낮고 평평한 옛 한양의 모습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그 뒤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낮은 산자락은 보면 볼수록 푸근해진다.

마을 북측 오미봉 정자에서 내려다본 금당실마을. ‘반서울’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소나무 사이로 보아도 정겹고 푸근하다.
오미봉 바로 아래 당산나무 역할을 하는 늙은 소나무. 마을의 재앙을 홀로 막아낸 듯한 모양이다.

오미봉은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보는 봉우리라는 의미다. 눈썹 같은 달이 떠오르는 모습(雅眉半月), 버드나무 숲에 아련하게 퍼지는 연기(柳田暮煙), 신선 고을에 피어 오르는 구름(仙洞歸雲), 용문사의 은은한 종소리(龍寺曉鍾),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竹林淸風)이 그것이니 높지 않아도 운치만은 그만이다. 봉우리 바로 아래 오래된 소나무 밑에는 ‘금당실동신제단’이 놓여 있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를 올리는 곳이다. 나이 든 소나무는 하늘 높이 뻗지 못하고 기둥 아래부터 옆으로 가지를 드리웠다. 잘려 나간 자리에는 옹이가 선명하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지는 지지대에 의존하고 있어 순탄치 않았을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면 금당실을 피해 간 모든 재난을 홀로 끌어안은 것 같아 조금은 애처롭기도 하다.

◇구한말의 수난 이겨낸 800m 금당실 송림

금당실의 또 하나 자랑은 마을 서쪽을 남북으로 800m나 관통하는 울창한 송림이다. 오미봉 바로 아래서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며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솔숲은 용문중학교 운동장과 바로 연결돼 있다. 다른 지역 학생들이 애써 찾는 소풍 장소가 교정인 셈이다.

금당실 송림. 구한말 3분의 1 규모로 줄었다지만 마을 숲으로는 여전히 큰 규모다.
이 숲을 중심으로 민가와 상가 구역으로 나뉜다.

금당실 송림은 여름철 금곡천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막고, 겨울철 소백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북서 한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마을 보호림이다. 어지러운 시기에도 외부로부터 재앙이 없었다는 자랑과 달리 금당실 송림은 구한말 큰 수난을 겪었다. 1890년대 말 조선 왕실로부터 오미봉 자락 금광 채굴권을 획득한 러시아가 공사를 시작하자 이에 항의하는 마을 주민과 충돌이 일어나 러시아인 두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법적 처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으나 당시 법무대신 이유인이 마을의 소나무를 목재로 내어 주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공사는 중지되고 결과적으로 오미봉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송림은 마을에서 1.5km 떨어진 병암정까지 연결돼 있었다니 지금의 3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이유인은 이 인연으로 금당실에 99칸짜리 저택을 지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정학진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준 금당실 송림의 비사다.

지금 울창한 숲을 이룬 송림은 수난을 겪은 후 다시 심은 것으로 수령이 120년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가슴 아픈 과거를 굳이 들추기 싫었던 걸까. 금광 채굴 현장에는 당시 얘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고 ‘의병대장 남천 박주상 선생 추모비’만 놓여 있다.

담쟁이와 화분으로 포위된 ‘추억의 금당실’ 카페였던 듯한데 문이 닫혀 있다.
문닫은 ‘용문이용실’도 담쟁이 넝쿨에 덮여 그대로 작품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OB식당’ 건물.

송림을 중심으로 금당실 마을은 민가와 상가로 나뉜다. 서울로 치면 명동인 셈인데 상가라고 해서 번듯한 건물이 들어선 건 아니다. 기와, 슬레이트, 슬래브 건물이 고루 섞여 있는 골목 풍경은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 회전을 멈춘 이발관 삼색 등을 담쟁이가 감싸고 있고, 허물어질 듯한 2층 건물 ‘OB식당’은 영업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넝쿨식물과 화분이 입구를 막고 있는 ‘추억의 금당실’은 카페인지 꽃집인지 정체를 모르겠고, 금당실 농장이 직영한다는 카페와 다방에도 선뜻 발을 들이기 주저된다. 예천군에서 금당실 전통마을 부활에 공을 들이고 있다니 멈춰진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예천 용문면과 금당실마을 여행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금당실마을 여행 정보

▦금당실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예천IC에서 가깝다. 풍기IC나 단양IC를 이용하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소백산 정취를 만끽하며 호젓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다소 불편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된다. 예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용문행 농어촌버스가 하루 13회 운행한다. 금당실마을에는 대여섯 가구가 한옥 민박을 운영한다.

예천양수발전소 상부 댐 어림호.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용문사 입구에서 맞은편 산정으로 이어진 도로로 오르면 예천양수발전소 상부 댐 호수에 닿는다. 옛 어림산성이 있던 곳이어서 어림호(御臨湖)라 부른다. 주차장이 잘 정비돼 있고, 주변에 하늘자락공원이 조성돼 있어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해발 740m로 기온이 서늘하고, 덜 알려진 탓에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하다. 나선형 전망대에 오르면 어림호와 소백산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실제 곤충으로 장식한 예천곤충생태원 전시실.
곤충생태원에서 예천읍내로 이어지는 도로에 꽃사과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

▦풍기IC에서 예천으로 넘어가는 길 소백산 자락에는 예천곤충생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에는 실제 나비와 다양한 곤충으로 장식한 작품이 있고, 모노레일을 타고 생태원으로 이동하면 나비 터널과 곤충 모양 놀이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생태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좋아할 곳이다. 곤충생태원에서 예천 방향으로 차를 몰면 도로변에 사과공원이 조성돼 있어 쉬어 가기 좋다. 일부 구간은 가로수로 꽃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색다른 가을 풍경을 선사한다.

예천=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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