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 항공사들에 유럽연합(EU)의 에어버스 항공기를 사지 말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대신 에어버스의 최대 경쟁자인 미국 회사 보잉의 항공기를 주문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EU의 팜오일 수입 제한에 맞서 보복 강도를 높인 것이다.
26일 블룸버그통신과 현지매체 등에 따르면, 엥가르티아스토 루키타 인도네시아 무역부 장관은 최근 인도네시아 최대 저비용항공사(LCC)인 라이온항공(Lion Air) 등 국내 항공사에 아직 계약 체결 전인 에어버스 항공기를 보잉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모든 항공사가 에어버스에서 보잉으로 전환하도록 정부가 지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루키타 장관은 “모든 선택지를 탐색하고 있다”고 답했다. 상업용 에어버스 항공기의 수입 금지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에어버스 측은 “적절한 수준의 대화가 필요한 국가 대 국가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루키타 장관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접촉한 루스디 키라나 라이온항공 공동 창업자는 ‘정부가 결정하는 대로 따를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지난 22일 보내왔다”고 소개했다. 루스디 키라나 라이온항공 공동 창업자는 현재 말레이시아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를 맡고 있다.
이번 정부 조치에 부응한 라이온항공의 대처는 일종의 변심이다. 라이온항공은 지난해 10월 자사가 보유한 보잉사의 737맥스가 추락해 189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이후 보잉사와의 항공기 구매 계약을 보류하고 에어버스로 갈아탄 바 있다. 추락 사건 직후 루스디 키라나 라이온항공 공동 창업자는 “(보잉에) 배신당한 기분”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라이온항공은 24억달러 상당의 에어버스 A330네오 항공기 8대를 주문해, 올 7월 첫 번째 비행기를 받았다. 국적기인 가루다항공도 라이온항공과 비슷하게 움직였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올해 인도네시아 항공사들이 에어버스와 계약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항공기 주문량은 219대로 추산된다. 라이온항공 178대, 가루다항공 16대, 시티링크 25대다. 올 상반기 항공기 판매 실적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보잉이 37% 급감한 반면, 에어버스는 28% 급증했다. 라이온항공(지난해 10월), 에티오피아항공(올 3월) 등 보잉의 주력 기종인 ‘737맥스’의 잇단 추락 참사로 사실상 주문이 끊긴 탓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에어버스가 8년 만에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라는 지위를 보잉으로부터 뺏어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팜오일 문제로 촉발된 EU와 인도네시아 간 무역 분쟁의 불똥이 항공업계로 튀면서 에어버스와 보잉의 양자 대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인구 2억7,000만명에, 1만7,000여개의 섬을 거느린 인도네시아는 항공 여객 수가 국내선을 중심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올 3월 EU집행위원회가 무분별한 산림 벌채에 의한 열대 우림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팜오일의 사용을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세를 부과하자, 인도네시아는 보복의 강도를 높여왔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및 파리기후협약 탈퇴 등을 거론하더니, 이어 유럽 양주의 수입을 제한하는가 하면, 최근엔 EU가 팜오일에 매긴 동일한 수준의 관세(8~18%)를 유럽산 유제품에 부과하기로 했다. 이번엔 유럽산 항공기에 관세를 부과하는 대신 자국 항공사를 설득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계 팜오일의 절반 이상(54%)을 차지하는 생산량 1위로 팜오일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데다, 팜오일 생산의 40%를 점하는 소규모 자작농 1,760만명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 인도네시아 입장에선 강공 외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의 무역전쟁에 이어 EU와 인도네시아도 전장에 들어선 형국이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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