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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 영화 100년] ‘맨발의 청춘’서 ‘대괴수 용가리’까지 장르 넘나들며 유행을 선도하다

입력
2019.08.24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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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충무로 흥행사 김기덕 감독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1961). 황해(왼쪽 두 번째부터)와 신영균 최무룡 박노식 등이 출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1961). 황해(왼쪽 두 번째부터)와 신영균 최무룡 박노식 등이 출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덕(1934~2017) 감독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아버지가 배재학당의 교감에 세브란스 의전 교수를 지냈던 교육자 집안 출신으로, 처음에 의과대학을 지망하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미 공군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이전된 부대를 따라 군산으로 간 김 감독은 시인 고은, 시나리오 작가 이종기와 같은 비슷한 연배의 문화계 인사들과 연을 맺게 된다. 이때 이종기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이강천 감독의 ‘종말없는 비극’(1958)으로 영화화된다)를 들고 전창근 감독에게 가는 길을 따라나선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김 감독의 유창한 영어 실력을 눈여겨본 전 감독은 미군과 한국인 통역 장교 간의 인간애를 주제로 한 ‘불사조의 언덕’(1955)의 주연으로 그를 낙점했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 테스트를 해보니 문제가 생겼다. 미군과 같이 촬영하기엔 김 감독의 키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것이다. 배역이 불발된 대신 전 감독은 연출부에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고, 이때부터 김 감독은 ‘단종애사’(1956), ‘마의 태자’(1956)를 비롯한 전 감독의 여러 작품과 한형모 감독의 ‘순애보’(1957) 등을 거치며 연출 수업을 받게 된다.

전창근 문하에서 같이 조감독으로 일한 동료 이종기, 충무로의 홍일점이었던 홍은원 감독 등과 손잡고 야심차게 우리(宇利) 필름을 설립했지만 제작비 투자의 문제로 영화사를 해산(이 때 우리 필름에서 창립작으로 준비하다가 유현목 감독에게 넘어간 기획이 바로 ‘오발탄’(1961)이었다)한 김 감독은 정치깡패 임화수가 사장이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전속의 편집감독이 되어 박성호 감독의 ‘실례했습니다’(1959)나 김화랑 감독의 ‘태양의 거리’(1959)를 편집하게 된다. 이 시기에 친해진 사람이 제작부장으로 일하던 차태진이었다. 4ㆍ19 혁명이 있은 후, 정치범이 된 임화수가 사형되고 한국연예주식회사가 해체되자 김 감독은 차태진과 손잡고 독립해 영화사 극동흥업의 공동창립자이자 전속감독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 5ㆍ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이자 차태진 사장과 절친한 사이였던 해병대 3성 장군 김동하가 “해병대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하고 제안을 하게 된다.

'5인의 해병'은 실탄을 사용한 연출로 실감나는 전투 장면을 만들어냈다.
'5인의 해병'은 실탄을 사용한 연출로 실감나는 전투 장면을 만들어냈다.

 ◇실탄 쏘며 만들어낸 데뷔작 

그 시절 전쟁영화란 군을 어떠한 부정이나 하극상도 없는 모범적인 조직으로 미화한 선전물이 대다수였다. 이에 김 감독은 “수신교본같은 이념이나 그런 캐릭터로만 만들라면 나는 못하겠다”며 일침을 놓았다. “해병대 정신을 투철하게 그려낼 테니 감독에게 자유재량권을 달라. 그렇다고 내가 해병대를 나쁘게 그리지는 않을 거다.” 김 감독의 데뷔작 ‘5인의 해병’(1961)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출신 배경과 성격을 지닌 군 장병들이 일시적인 갈등을 거쳐 끈끈한 전우애로 묶이는 과정에 전반부를 할애하고, 후반부는 북한군 탄약고를 폭파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치열한 전투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데, 촬영 과정에서 김 감독은 전부 실탄과 실제 폭약을 사용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군에서 차출한 특등사수를 시켜 발자국 근처를 쏘라는 지시를 한 탓에 최무룡과 신영균을 비롯한 배우들은 연기가 아니라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거나 포복하며 은폐, 엄폐를 해야 했고, 그 덕에 실감나는 전투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저마다 개성이 있고 환경이 다른 해병들의 전선생활과 가정을 연결지으면서 소박하고 솔직한 해병의 인간상을 그린 작품”(경향신문 1961년 10월 28일)이란 호평에 서울 관객 5만명을 동원하며 ‘5인의 해병’은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았다.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영화의 제목을 딴 날치기단이 치안 당국에 검거된 일이 언론에 보도되어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은 이 데뷔작으로 1962년 제1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 뒤에도 ‘남과 북’(1965), ‘용사는 살아있다’(1965), ‘성난 대지’(1968)와 같은 한국전쟁 소재의 전쟁영화를 다수 연출하게 된다.

김기덕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덕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춘영화, 스포츠영화까지 섭렵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 김영수 원작의 HLKA 라디오(KBS 라디오 전신)의 방송극을 극화한 ‘신입사원 미스터 리’(1962)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신입사원(신영균)이 상사들의 부패와 불의에 겁 없이 맞서는 한 편,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전계현)와 동료 여사원(엄앵란) 사이에서 갈등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청춘코미디였다. ‘신입사원 미스터 리’는 “부패한 사회 단층의 풍속도를 멜로드라마적인 터치로 김기덕 감독의 솜씨는 신인답지 않게 안정감이 있다”(동아일보 1962년 7월 15일)는 반응을 얻었다. 이 영화에서 반항적인 젊은이가 등장하는 청춘영화의 가능성을 실험한 김 감독은 일본작가 이시자카 요지로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을 원작으로 삼은 ‘가정교사’(1963)로 본격적인 청춘영화의 유행에 불을 댕긴다. ‘가정교사’는 서울관객 10만의 대박을 터뜨리며 김 감독 연출에 신성일, 엄앵란 커플 조합의 청춘영화는 반드시 흥행한다는 공식이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고, 연이어 36만 관객을 기록한 ‘맨발의 청춘’(1964)의 대히트는 청춘물을 대세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청춘물의 시효는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1960)이었지만, 장르의 틀을 정립하고 대중영화의 주류로 각인시킨 건 장르의 흥행사인 김 감독의 업적이었던 셈이다.

김 감독의 관심사는 한 장르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시장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냈고, 재빠르게 다른 장르로 이동하며 유행을 선도했다. 김지미, 신성일 주연의 ‘칠십칠번 미스 김’(1963)은 기울어진 집안의 생계를 위해 댄서가 된 여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건축기사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의 과거와 직업적 배경에 발목 잡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의 인물 설정과 서사는 훗날 1970년대를 풍미하는 호스티스 멜로의 전형성을 10년은 족히 앞서서 완성한 것으로, 사실상 호스티스 장르의 창시작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한국 스포츠 영화의 초석을 놓은 것도 김 감독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야구팬으로 사회인 야구단에도 열성이었던 그는 일본 각본가 기쿠시마 류조의 동명 시나리오 판권을 사들여 ‘사나이의 눈물’(1963)을 내놓는다. 야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제작된 한국영화사 최초의 스포츠 영화는 “신파조 냄새가 물씬 하는 제목 같으나, 내용은 전혀 뜻밖인 산뜻하고 건강하고 감동적인 홈드라마”(조선일보 1963년 11월 17일)이자 ‘야구감독의 고충을 제대로 담은 영화’란 호평을 얻었다. 이후에 김 감독은 복싱으로 소재를 옮겨 국내 첫 세계챔피언 김기수 선수를 주연으로 발탁한 ‘내 주먹을 사라’(1966)로 화제를 끄는가 하면, 고교 야구를 다룬 ‘영광의 9회말’(1977)을 은퇴작으로 만들게 된다.

한국 SF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대괴수 용가리'(1967). 거대 외계생명체가 서울시청을 부수는 장면 등 특수효과를 활용한 연출로 당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SF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대괴수 용가리'(1967). 거대 외계생명체가 서울시청을 부수는 장면 등 특수효과를 활용한 연출로 당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SF영화의 기원 

“고속도 촬영기 5대, 한국최초 50㎜ ’즈므 렌즈‘(줌 렌즈) 사용, 비행기 30대, 탱크 20대, 로케트 24문, 자동차 50대, 헬리콥터 2대(이상 1/20 축소모형), 인왕산, 남산세트 건축에 흙 700트럭, 남대문 건조에 목수 120명, 서울 시가지 세트에 석회 1200포, 용가리 머리에는 전자장치, 동양 유일의 구름과 안개 제조기 사용, 우주공합 캡슐 발사 3회, 수폭 투하용 구름 제조에 1개월.”(동아일보 1967년 8월 10일)

늘 새로운 장르에 목말라있던 김 감독의 도전정신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영역을 향했다. ‘고지라’(1954)와 ‘가메라’(1965) 등 특수촬영 기법을 활용한 괴수물이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을 주목한 김 감독은 이를 벤치마킹해 한국형 괴수영화 ‘대괴수 용가리’(1967)를 만든 것이다. ‘가메라’를 제작한 일본 기술진의 협력을 얻어 미니어처와 스크린 프로세스 등 선진적인 아날로그 특수효과 기법을 대거 도입한 ‘대괴수 용가리’는 대번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언론에서는 영화의 제작 규모와 물량 등을 화제 삼아 연일 집중 보도를 쏟아냈다. 서울 관객 11만 3,000명의 대흥행에 미국과 홍콩, 심지어 괴수물의 본산인 일본에까지 수출되는 성과를 올린 ‘대괴수 용가리’는 한국 영화 최초의 SF로 뒤처져있던 한국영화계의 기술적 수준을 진일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쉬리’(1997)가 있기 이전에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원형을 제시했다. 분명 김기덕은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서서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욕망을 읽어낸 기획자로서의 명민함, 한국 영화의 장르적 다양성과 상상력을 확장한 개척자의 모험적 면모는 다양성과 도전정신을 잃어가는 오늘날 한국영화에 있어 재조명되어야 할 모습일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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